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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S의 창조목적/타락론 비판
2012년 06월 14일 (목) 00:02:42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정이신 목사 / 1999년 JMS탈퇴, 아나돗교회 담임

1. 들어가며

성경 밑바탕에는 타락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라는 구속사적 흐름의 대전제가 깔려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섭리사(攝理史) 혹은 구원사(救援史), 구속사(救贖史)라고 한다. 따라서 타락론과 구원론은 이런 흐름에서 내적인 일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로마서 6:22~23). 다시 말해 타락의 원인은 어떤 식으로든 구원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만약 타락론에서 타락이란 ‘이것’이라고 열변을 토하다가 구원론에 와서는 구원은 ‘요것’이라고 하면서 타락과 전혀 관계없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성경에서 타락과 구원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동전의 앞뒤처럼 둘로 구분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JMS교에서는 하와가 미완성기 때에 성행위(性行爲, sex)를 해서 타락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나 하와가 타락했을 때가 미완성기 때였는지, 미성년자였는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완성기(完成期), 장성기(長成期), 소생기(蘇生期)라는 말도 없다. 이것은 <원리강론>에 나오는 말로 JMS교에서 차용 및 표절한 말이다. 그런데 JMS교의 주장처럼 인간의 타락이 ‘성적타락(性的墮落)’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구원론과 얼마나 내적 일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들의 주장처럼 인간의 타락이 미완성기의 성적타락이라면 내적 일관성의 원칙에 따라 성적구원(性的救援)은 피할 수 없는 구원론의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구원론은 성경에 없고, 예수님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초기 JMS교의 구원론은 요한복음 5:24에 대한 질문을 통해 기독교 근본주의(基督敎 根本主義ㆍFundamentalist Christianity) 구원론이 갖고 있는 불합리함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했다.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것이 바로 부활이며 구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성(性, sex)으로 타락했으니 성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표면적으로 구원론뿐만 아니라 다른 강의에서도 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타락론 밖에 없었으며, 그것도 아담과 하와의 ‘일회성’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JMS교의 교리가 지닌 자체 모순이다. 같은 얘기인데 전혀 다르게 얘기하는 것이고 타락론과 구원론이 내부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론을 강의할 때는 성적타락이라고 흥분해서 열을 내다가 구원론을 강의할 때는 성적타락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을 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알리는 행위이다. 이것은 최소한 둘 중의 하나, 타락론이든지 구원론이든지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락론과 구원론이 내적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구원론을 타락론에 맞게 성으로 구원받으라고 바꾸든지 타락론을 구원론에 맞게 고쳐야 한다. 인간이 성으로 타락해서 이 세상에 사탄이 들어왔는데, 흑암의 세력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구원론에서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성의 역할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자체적으로 모순을 가진 교리임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나 신념을 대외적으로 주장하기 이전에 그 가치나 신념으로 자기 자신을 먼저 점검하면서 그 가치나 신념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따져보는 태도를 성찰성(省察性)이라고 한다. 특별히 종교의 기능 중의 하나가 ‘자기성찰성(自己省察性)’이다. 자기성찰성이 없는 종교는 이중교리(二重敎理)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교주에게 적용되는 교리, 밖으로 표출되는 교리와 일반신도, 안에서 가르치는 교리가 다르게 된다. 자기성찰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나 신념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음을 먼저 상정하고(경전 해석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음을 상정하고),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나 신념, 해석을 끊임없이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경전(經典)에 다시 비춰보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JMS교리는 기독교적인 자기성찰성이 없다. 또한 이중교리(二重敎理)이다. JMS교주에게 적용되는 교리와 일반 신도들에게 적용되는 교리가 다르다. 따라서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가치관과 신념에 따른 구원은 있을지 모르지만 복음, 성경의 가르침에 의한 구원은 없다. 모든 JMS교리비판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당신들이 믿고 따르는 가치관과 신념에 의한 구원은 있을지 모르지만 복음에 의한 구원은 없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JMS교리비판의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JMS교의 성경해석이 틀렸다고만 하면 안 된다. JMS교는 자신들의 이러한 약점을 벗어나기 위해 구원의 주체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로 성경에도 없는 또 다른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것처럼 교리를 꾸며댄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과 하나님, 성령님을 분리한다. 결국 겉으로 삼위(三位)라고 하지만 안으로는 삼신론(三神論)이 된다.

2. JMS교리에 대한 성경적 비판

1) 요한복음 10:34~36 주해

요한복음 10:34~36은 예수님께서 시편 82:6을 인용한 말씀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시편 82:6~7을 살펴보자.

“내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신들이고 너희 모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다 하였지만 너희들은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고관들 중의 하나처럼 쓰러질 것이다.”(히브리어 직역 구약성경)

시편 82:6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神)’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신적인 생명’을 가진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구절은 고대에서 왕을 ‘신(들)의 아들’로 부른 것을 그 배경으로 하는 표현으로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신’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는 ‘엘로힘’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엘’의 복수형 ‘에로하’에서 온 말로 하나님을 뜻하는 말로만 쓰이지 않았다. 신적인 것과 관련하여 ‘신적인 강한 권능을 부여받은 인간’, 혹은 ‘위대한 인간(지배자, 통치자, 재판관)’을 뜻하는 말로도 쓰였다. 한마디로 “너희들이 신(들)의 아들이라고 까부는데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내가 모조리…”가 시편 86:6~7의 의미이다.

요한복음 10:36은 시편을 인용한 요한복음 10:35을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의 위치를 밝히시는 말씀이다. 이를 쉽게 풀어보면 “너희는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 유대인을 통치하며 온갖 악행을 범하면서도 엘로힘(신들, 곧 통치자)이라 칭하는데, 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선한 일들을 행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이 어딜 보아 신성 모독이냐”가 된다. 이렇게 이해해야 요한복음 10:37과 요한복음 10:34~36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따라서 이 구절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神)이라고 했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신 같이 창조했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이는 인용된 구약성경 시편 82:6의 의미와 완전히 다르다. 예수님도 JMS교의 주장처럼 ‘인간을 신 같이 창조’했다는 의미로 시편 82:6을 인용하시지 않았다. 또한 이는 JMS교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인간의 창조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유대인과 논증을 하시던 과정에서 시편을 인용하신 것이다.

JMS교는 요한복음 10:34~36을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을 ‘신적인 존재’, ‘신 같이’ 창조했다는 의미를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이 성경구절은 JMS교의 교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회복된 인간이기에 그가 바로 신적인 존재라는 말을 돌려서 하기 위한 근거로 쓰인다. 구약성경 시편 82:7에 의하면 그 신 ‘들’이 죽는다(‘신’이 아니라 신‘들’이다. 하나님‘들’이 아니다. 하나님‘들’이 아니기에 JMS교의 주장처럼 하나님과 전혀 연관이 없다). 무슨 신이 죽는가? 그리스·로마신화에서도 신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 이는 JMS교 주장의 허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2) 인간의 궁극적인 창조목적은 창세기 1장 28절인가?
JMS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창조목적을 창세기 1장 28로 본다. 그런데 이는 통일교에서 JMS교를 비판할 때 사용했던 구절이기도 하다. ‘인간의 창조목적에 결혼(번성)이 포함되어 있는데 어째서 JMS교주는 결혼을 하지 않는가’, ‘창조목적을 이루려 하지 않는가’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다. 이때 JMS교주는 예수님과 바울을 이야기하며 마태복음 19:12을 근거로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는 통일교의 비판처럼 JMS교의 논리가 맞지 않다. 인간의 궁극적인 창조목적이 창세기 1:28이라면 가장 신앙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교주가 먼저 결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창세기의 전체적인 흐름과 창세기 2:4부터 시작되는 창세기 ‘톨레돗’(toledoth·계보) 10개 등을 고려했을 때 창세기 1:1~2:3>을 한 흐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 경우 인간의 최종적인 창조목적은 하나님과 같이 안식하는 것(창세기 2:3)이 된다. 창세기 1:1~31을 한 단락으로 본다면 인간의 창조목적이 창세기 1:28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세기 2:3까지를 한 단락으로 볼 경우 인간의 궁극적인 창조목적은 2:3이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창조목적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하는 안식을 얻는 것이다. 쉼과 안식은 다르다. 그리고 안식은 막연한 육체적 죽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가정은 쉼의 공간이다. 그러나 주일 예배는 우리가 잠시 안식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셨다. 결국 창세기 1:28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것은 안식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요, 쉼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들일 뿐이다.

만약 창세기 1:28이 궁극적인 창조목적이라면 우리는 동물들에게서 우리 삶의 윤리적 교훈들을 얻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세기 2:3이 궁극적인 창조목적이기에 우리는 안식이라는 거룩성, 동물과 구별되게 하나님을 인지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쉼이 아닌 안식의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살아가게 된다.

통일교에서는 예수님이 결혼을 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영적인 결혼을 시켜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JMS교는 이러한 논리를 변형하여 받아들였다. JMS교에서도 예수님은 구원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 존재이다. 그러나 일반 추종자들에게는 창세기 1:28을 변형하여 JMS교에서 주장하는 진정한 창조목적을 이뤄야한다고 주장한다. 하늘신부(요한계시록 19:7~8)가 되어 JMS교주와 영적(육적)으로 결혼하는 것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JMS교에서 말하는 영적 축복이다.

3)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인간이다
JMS교는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고 한다. JMS교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는 신앙의 시조일 뿐이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아들을 뜻하는 ‘벤’은 ‘아들’이라는 뜻만 아니라 ‘자손’, ‘집을 세우는 자’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연결되는 성경의 족보에는 생략된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도 히브리어에서는 벤으로 연결된다. 다윗의 경우를 보자. 사무엘상 16:1~11을 보면 그는 이새의 여덟 째 아들이다. 그러나 역대기상 2:13~15을 보면 그는 이새의 일곱 째 아들이다. 신앙적으로 꼭 기록을 남겨야 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 족보에서 혈연의 계대 관계를 건너뛰어 기록한 경우이다.

이러한 예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사사시대에서 통일왕국으로 이어지는 보아스와 다윗의 족보를 보면(룻기 4:21~22) ‘보아스-오벳-이새-다윗’으로 이어지는 4대의 기간이 사사기와 통일왕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시기에 비해 다소 느슨하다. 룻에 얽힌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사사기의 어느 시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사기와 다윗의 치세로 이어지는 시기를 사사기의 족보에 따라 4대만에 이루어진 일로 보기에는 룻이 모압 여자였다는 사실 등을 고려했을 때 신앙 계대(繼代)의 간격이 너무 느슨하다. 따라서 그 안에 생략된 족보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고(cf.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족보 비교), 이 경우 아담과 하와가 6,000년 전의 사람이기에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신앙의 조상이라는 JMS교의 주장은 성경에 위배된다(교리 강의 중에 JMS교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과학적 사실들을 열거한다. JMS교는 성경이 과학적 사실과 부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과학 관련 서적이 아니기에 과학적 사유방식으로 성경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히브리 족보에서 여자는 대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고, 아담과 하와는 최초 인류이지만 아담과 하와 그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족보에서 생략된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를 고려하지 않고 지구 역사를 성경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수치인 6,000년으로 환산한 뒤 이것이 과학적 사실에 위배되기에 아담과 하와가 신앙의 조상이고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고 하는 JMS교의 창세기 이해는 비성경적이다.

4) 아담과 하와는 성행위(性行爲·sex)로 타락하기 전 이미 부부였다
-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와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창세기 2:9 vs 2:22)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기 이전에, JMS교리에 따라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성관계를 맺기 이전에 이미 ‘부부(夫婦)’였다. 하나님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에게 배필을 줄 테니까 가서 네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고 말씀하신다(창세기 2:18, 2:25). 창세기 2:25은 아담과 하와가 부부로 맺어졌음을 알려주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따라서 뱀이 하와를 꼬여서 타락하게 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부부로서 한 몸’을 이루고 난 후의 일이다. 시기적으로 타락 이야기는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부부가 된 후인 창세기 3장에 나온다.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부부로서의 성관계를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뱀이 하와를 꼬여서 맺은 하와와 루시퍼의 성관계가 인간 최초의 타락이란 말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제목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든 후에 만드셨다.

인간의 타락을 <원리강론>처럼 영적인 존재인 천사(루시퍼)와의 영적 간음으로 이해하든지 JMS교처럼 인간(人間) 사탄으로 이해해서(JMS교에서는 루시퍼가 人사탄이라고 한다), 하와가 아담이 아닌 다른 존재와 성관계를 맺은 것이라고 이해할 경우 생기는 문제는 또 있다. 창세기 3:6에 의하면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 준다. 그런데 여기서 “함께”를 뜻하는 히브리어 ‘임’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만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말은 하와가 타락하는 현장에, 선악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현장에 아담이 같이 있었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쉬운성경은 이러한 어감(語感)을 그대로 번역하고 있다.

“여자가 보니, 그 나무의 열매는 먹음직스러웠으며, 보기에도 아름다웠습니다. 게다가 그 열매는 사람을 지혜롭게 해 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그 열매를 따서 먹고, 그 열매를 옆에 있는 자기 남편에게도 주었으며, 남자도 그것을 먹었습니다.”(창세기 3:6)

히브리어 ‘임’을 같이 살고 있는 사람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학계에는 더 많다. 그런데 히브리어 임은 ‘함께’, ‘더불어’의 뜻이 있으므로 이를 아담이 하와의 타락 현장에 같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해도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어감을 살려 성경을 이해했을 때 JMS교의 타락론은 하와가 천사 혹은 다른 남자와 성행위를 하는 현장에 아담이 같이 있었던 것이 된다. 그리고 하와는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성행위를 한 다음 그것을 지켜보던 자신의 남편 아담과 성행위를 한 것이 된다.

5) 인류의 타락은 하와의 수음(手淫, masturbation)으로부터 시작되었다
JMS교의 타락론이 가진 논리 전개의 흐름을 보면 하와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보고 성적인 매력을 느꼈다. 그런데 선악과가 여자를 뜻하는, 구체적으로는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상징과 비유라는 JMS교의 성경 해석을 따르면 창세기 3:6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하와는 자신의 몸을 보고 성적 흥분을 느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와는 자신의 몸에 있는 자신의 성기를 보고 성욕을 느낀다. 따라서 하와가 루시퍼 및 아담과 성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수음(手淫, masturbation)을 한 것이 인류 최초의 타락이다. 성경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딴 주체가 여자로 기록되어 있다. ‘루시퍼가 여자를 따 먹었다(루시퍼가 하와와 성행위를 했다)’는 JMS교의 교리는 행위의 주체를 혼동한 해석이다.

6) 타락한 천사 루시퍼(Lucifer)는 성경에 없다
JMS교에서는 루시퍼를 영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육적인 존재라고 한다. 루시퍼의 영이 임한 인(人)사탄(사람사탄)이 하와와 성관계를 맺은 것이 인류 타락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런데 JMS교 타락론에 등장하는 루시퍼는 히브리어 성경에 없는 이름이다. 유다서 6절에서 ‘자기의 처소를 떠나 타락’했다는 천사들의 이름에도 루시퍼는 나오지 않는다. <원리강론>과 JMS교가 타락한 천사의 죄로 거명하는 유다서 7절에도 천사들이 저지른 죄가 구체적으로 창세기의 하와와 성관계를 한 것이라고 명기되어 있지는 않다. 루시퍼는 이사야 14:12의 ‘계명성(새벽별)’을 라틴어로 번역한 벌게이트(Vulgate)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다.

JMS교는 루시퍼가 하나님의 경호천사장였다고 한다. 하나님의 경호천사장이었기에 하나님을 늘 따라다녔고, 하나님의 비밀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천사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에 ‘섭섭함’을 느끼고 하와를 타락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무슨 경호천사가 필요한가? 경호천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 하나님을 위해(危害)하려는 존재가 있다는 말인데 인간세(人間世)의 국가 원수도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위해 하려는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말이 가능한가?

7)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
창세기 2:9의 선악과(善惡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NIV)로 번역할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선악과를 하와(인간)가 따먹었다’는 것은 선악을 구분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거부하고, 하와(인간)가 이에 대해 주도권을 가지겠다고 한 것이다.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주장을 펼치기 시작한 한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타락, 죄의 시작이다. 이때부터 선악을 구분하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된다. 성경은 끊임없이 선악을 분별하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은 선악의 가치를 자신의 마음대로 고치려는 인간을 고발한다.

에덴은 선악과(善惡果)가 있는 곳이다. 에덴에는 아담의 주권을 막을 수 있는 어떤 피조물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담을 구별시켜주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것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은 곳에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의 차이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 나무를 심은 곳에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며, 나아가 자신의 통치자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이 에덴에 일구신 동산 중앙에 선(善)과 악(惡)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었다. 그래서 그 나무의 열매만은 아담이 먹을 수 없었다(창세기 3:2~3). 그 나무야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간 앞에서 드러내는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그 나무를 보면서 에덴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상기해야 했다. 그러나 뱀(사탄)의 유혹은 인간에게 스스로 하나님이 되게 했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경계선,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경계선을 없애버리게 했다. 인간 스스로 선악을 판별하는 일에 주체가 되게 함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부정하게 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 존재임을 부정해 버린 사건이다.

8) 부끄러워 가린 곳은 어디인가
아담과 하와가 ‘타락 후 부끄러워 하체를 가렸다’는 성경의 기록을 JMS교는 성범죄, 그것도 미성년자의 성범죄로 해석한다. 미성년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성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타락했는데, 아담과 성관계를 맺기 이전에 이미 하와는 타락해 있었다(다른 존재와 이미 성관계를 맺은 후였다). 그런데 도대체 몇 살부터 미성년자인가? 연령으로 성년과 미성년을 구분 짓는 것은 문화적 관행이지, 객관적 측정은 아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부부’(창세기 2:18~25)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을 미성년자였다고 가정하는 JMS교의 창세기 이해는 비성경적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세기 타락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이미 사탄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시작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탄과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 타락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해 버린다.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시지만, 사탄과 대화를 나누던 하와는 이 구절을 빼 버린다. 인간은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 자아(自我)가 형성되게 되어 있다. 인간이 굳이 예수 그리스도도 아니고 자신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탄과 대화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9) 에덴의 아담과 신약의 예수님
- 타락 전 에덴의 아담과 예수님은 동급(同級) 인간이 아니다

JMS교는 에덴동산의 첫째 아담이 당시의 시대적 메시아였다고 한다. 그 아담, 첫 번째 아담은 죄를 지어 타락했다. 예수님은 회복된 아담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Second Adam)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영적(靈的)인 구원만을 이루셨기에(cf. 요한복음 19:30에 위배된다), 이제 세 번째 아담(Third Adam)이 와서 완전한 육적(肉的) 구원, 창조목적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는 인간과 짐승은 같은 날(여섯째 날)에 창조된 피조물로서 서로 가까운 친족 관계였지만, 땅의 육축과 짐승들은 그 종류대로 만들었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인간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닐 것이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존재로서 죄와 타락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 그리고 부활 전의 예수님뿐이다(히브리서 2:17, 4:15). 다른 모든 인간들은 왜곡되고 뒤틀려 있고 타락한 인간성의 표본들로만 나온다(로마서 3:10∼12).

창세기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먼저 흙으로 만들어진 후,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생명의 호흡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창조되는 과정은 동물을 비롯한 생물체의 그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창조되는 과정이 다르다는 것은 존재로서의 본질적 위상이 달랐다는 말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5일째, 6일째 창조되어 나온 식물 및 동물들을 나타내는 말인 ‘생물(living creatures)’이나 마지막 날 창조된 인간을 나타내는 말인 ‘생령(a living being; a living spirit)’이나 히브리어로는 모두 ‘네페쉬 하야’(Nepesh hayyā)를 쓴다는 것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개역개정성경>의 번역인 생령(生靈)을 <새번역성경>처럼 살아있는 ‘생명체(목숨이 붙어 있는 존재)’쯤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현재 <개역개정성경>은 이를 각주로 처리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생물’이라고 창세기 2:7의 생령에 각주를 달아 놓았다.

땅 위에 있는 일반 생물체들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를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모두 네페쉬 하야라고 하지만 사람이 창조되는 것과 달리 일반 생물체의 생명은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영을 불어 넣으시는 과정이 없었다(창세기 2:7). 일반 생물체는 하나님의 땅에 대한 직접적인 명령으로 생겨났고(창세기 1:24), 이로 인해 생물체에 부여된 네페쉬(목숨, 생명)의 근원은 땅이었다. 그래서 땅에서 생겨난 그것들은 평생 땅을 근거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 네페쉬(목숨,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입김으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비로소 살아있는 네페쉬가 될 수 있었다. 똑같이 네페쉬 하야지만 다른 생물체들이 가진 생명의 기반은 땅인 반면 인간이 가진 생명의 기반은 하나님이었다(cf. 전도서 3:20~21).

따라서 인간의 네페쉬는 다른 피조물의 네페쉬와 달리 땅에 근거해서만 그 생명이 유지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그 생명이 유지되는 존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유지된 관계가 단절되고 땅의 것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인간의 생명을 죽음이라고 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했지만 따먹고 나서도 여전히 930살까지 살았다(창세기 5:5). 이는 아담과 하와가 일반적인 동물로서의 네페쉬를 살아간 것이지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 즉 하나님과 관계가 유지되는 존재로서의 네페쉬를 살아간 것은 아니었음을 뜻한다(cf. 요한계시록 3:1).

예수님 안에서 거듭났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생명은 단순히 이 지구상의 생물과 같이 창조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창세기 2:7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호흡과 생명을 불어 넣으신 것이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은 살아있는 네페쉬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할 수 있는, 일반 생물체와는 다른 존재가 된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살아있는 네페쉬의 생명을 잃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생물들의 네페쉬는 있을지 모르지만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서 만드신, 진정한 인간의 살아있는 네페쉬 하야는 없다.

네페쉬는 그것이 생물체의 네페쉬가 아니고 인간의 네페쉬인 경우 인간의 영적 존재를 뜻하며, 이 영적 생명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전적으로 훼손되었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이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영적 교제관계를 가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믿음과 인격적인 움직임, 활동, 의지를 포함한다. 요한복음 20:22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는데 이는 창세기 2:7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JMS교의 주장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은 단순히 창조 당시, 타락 이전 상태의 아담(Adam)인 네페쉬 하야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성령님의 은혜로 온전히 거듭나는 것은 창조 때 첫 번째 아담의 생명으로 복귀하여, 일반적인 생명의 사람이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 성령님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요한복음 3:5, 고린도후서 5:17).

고린도전서 15:45~49에서 바울은 첫 사람 아담, 에덴의 아담을 산 영(living spirit)이라고 했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을 살려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고린도전서 15:45의 헬라어 본문을 보면 타락 이전의 아담은 히브리어 ‘네페쉬’의 헬라어 번역인 ‘프쉬케’를, 예수님은 성령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의 헬라어 번역인 ‘프뉴마’를 쓰고 있다. JMS교의 주장처럼 예수님은 타락 이전의 아담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타락 이전의 아담과 다른 하늘에서 오신 존재이다.

10) 천국은 여자가 없다, 여자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요한계시록 22:1~5은 새 창조의 주인인 교회가 창세기에서 제시한 첫 창조의 목적에 해당하는 완전한 회복을 이룰 것임을 말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의 종말적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에덴과 창조목적의 완전한 회복은 이루어진다. 성경에서 종말론적 완성은 첫 창조 이상의 회복이다. 구약-유대적 전통에서도 새 에덴은 항상 종말론적 축복으로서 새 예루살렘과 공존했다. 이러한 면에서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독자들로 하여금 첫 번째 에덴동산의 모든 소망이 성취되는 새로운 낙원인 새 에덴동산을 그리게 한다. 창조신학의 마지막 요점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1~5은 이를 표현하기 위해 에덴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에스겔 47:1~12의 환상까지 차용하면서 낙원 모티프를 덧붙인다. 에덴동산의 선악나무와 달리 이 나무(생명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잎사귀는 열국에 치료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요한한계시록 22:1~2은 창세기 2장과 에스겔 47장의 환상을 묘사의 근원에 두고 있다. 에스겔은 염분이 많은 죽음의 바다 사해(死海)가 생명이 충만한 바다로 변하고, 강 좌우편의 마른 땅에 수목이 울창하게 자라는 환상을 보았다(에스겔 47:7~8, 12). 따라서 이 강의 원천은 곧 생명의 원천이 된다. 마지막 나라의 모습은 주님의 넘치는 생명이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1의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수 강물의 출발점을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는 에덴동산 꼭대기에서 강물이 흐른다. 에스겔서 47장에서는 성전에서 강물이 흘러나온다. 요한계시록 22:1에서는 그 강물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이러한 강물의 원천 변화는 에덴동산과 에스겔의 성전을 통해 기대했던 바가 새 예루살렘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에덴동산도 아니고 성전도 아닌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백성과 함께 있어 생명수의 원천이 되신다(cf. 요한복음 2:19~22). 그리고 요한계시록 22:2을 통해 새 예루살렘에서 에덴의 회복은 생명수 강의 양 옆에 있는 달마다 12실과를 맺는 생명나무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첫 창조 때에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예비하였던 생명나무가 이제 종말에 교회를 위해 준비된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생명력이자 종말적 교회 공동체의 삶 속에 주어지는 에덴의 회복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에도 생명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한 후 생명나무로 나가는 길이 차단되었다. 천사가 지키고 서 있으면서 사람들이 그리로 나오는 것을 막았다(창세기 3:24). 그러나 이제 그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다. 이런 면에서 생명나무는 죄와 죽음, 부패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방해하는 세력들의 저주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잠언에서 생명나무는 지혜, 지혜 있는 사람의 교훈(잠언 13:14), 야훼를 경외하는 것(잠언 14:27), 명철(잠언 16:22) 등과 같은 의미가 함축된 말로 쓰인다. 그러므로 JMS교의 주장처럼 생명나무가 아담(남자, 남자의 성기)을 그리고 선악나무가 하와(여자)를 뜻한다면 완성된 천국에는 생명나무만 있으므로 여자는 천국에 없는 것이 된다. 아니면 여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이다.

3. 글을 마치며

<원리강론>과 JMS교의 주요 교리(종말론, 부활론, 예정론, 창조목적/타락론 등)는 거의 같다. JMS교에서는 그들의 주요 교리가 <원리강론>과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교리 구성과 핵심 주장을 보면 거의 같다. 완전히 <원리강론>의 표절이다. 그렇다면 청소년, 청년층이 <원리강론>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이상한 해석이라고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JMS교의 주요 교리에는 잘 속는 이유가 무엇인가?

먼저 교리의 전달 방법을 들 수 있다. <원리강론>에서는 창조목적과 타락론을 앞부분에 놓음으로써 처음부터 <원리강론>을 듣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지만 곧이어 교리적인 의구심을 들게 한다. 그러나 JMS교는 비유론을 앞부분에 놓아 성경이 비유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임을 먼저 주지시킨 후 주요 교리를 전개한다. 30개론에서 20개론으로 바뀐 후 비유론이라는 강의는 없어졌지만 JMS교는 여전히 성경을 비유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JMS교는 성경을 비유로 해석하게 함으로써 성경의 모든 이적과 기적을 과학적, 합리적 이성으로 해석해 버린다.

예를 들어 ‘부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등을 과학적, 합리적이지 않다고 상징과 비유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성경의 난해(難解) 구절들이 지닌 의미를 자신들이 자신 있게 알려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며 JMS교의 성경 해석을 제시한다. 이것이 성경의 기적과 이적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쉽게 JMS교에 빠져드는 이유다. 둘째, 교주와 달리 일반 사람들에게는 철저한 성적 순결을 강조하고, 문화활동(RAS: RecreationㆍArtㆍSport) 등을 통해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포교를 함으로써 교리 이전에 먼저 JMS교에 대한 이미지를 제고시킨다. 통일교의 경우 문선명에 대한 이야기를 드러내 놓고 하지만 JMS교의 경우 교주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에는 전혀 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JMS교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슬그머니 교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미 인간적으로 친숙해져버린 상황에서 JMS교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기에 <원리강론>과 같은 교리임에도 전혀 다른 것을 들은 것 같은 효과가 난다.

이제 모두(冒頭)에서 제시한 것을 다시 확인하며 글을 매듭지으려 한다. JMS교리비판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하는, 기독교이단교리비판을 통해 우리 기독교인이 얻어야 하는 자기성찰성은 무엇인가? ‘JMS교리가 틀렸다’, ‘JMS식 성경해석에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이해가 개혁’되어야지 ‘성경의 가르침을 개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기독교이단교리비판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하는 더 중요한 자기성찰성의 덕목이 아닐까?

JMS교는 겉으로 자기들이 성경에 대한 이해를 개혁시키는 곳인 것처럼, 한국교회를 개혁하려는 곳인 것처럼 포장했다(이는 많은 기독교이단들이 쓰는 방법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을 개혁시키려고 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많은데 성경은 그것을 다 담고 있지 않아서 예수님이 알려주신 것을 더 들어봐야 한다고,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고, 새로운 인봉을 풀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지켜져야 한다. 성경은 보수(補修)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보수(保守)되어야 한다. 피터 엔즈(Peter Enns)의 말을 빌리자면 ‘아담의 진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담에 대한 이해의 진화’가 더 중요하다.

만약 어떠한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구원에 굳이 필요하지 않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신명기 29:29). 바늘 끝 위에 천사가 몇이나 올라갈 수 있느냐를 따졌던 중세기의 일부 수사들의 엉뚱한 논쟁과 질문처럼 우리들의 구원에 불필요한 호기심에 미련을 갖고 그것으로 성경을 개혁하려는 태도는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일부 기독교이단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이해와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혼동하여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는 일부의 흐름이 마치 자기들을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호도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혁될 필요가 없다. 개혁교회의 모토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한다’(E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처럼 교회가 개혁되어야지 기독교가 개혁될 필요는 없다. 기독교를 개혁시키겠다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흐려놓은 사람들이 바로 JMS교도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은 ‘개(犬)’독교를 ‘개(開)’독교라는 언어유희로 읽어낼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자신감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때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이단에 대한 성경적인 대응책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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