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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야드운동에 대한 조직신학적 입장에서의 평가
1996년 03월 01일 (금)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김성봉 박사 :
- 서울대학교 철학과(B.A.), 합동신학교(M.Div.), 아세아 연합신학원(Th.M)을 졸업하고 독일의 뮌스터대학교(Wilhelms Universitaet zu Muenster)에 유학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

빈야드 운동이란?

빈야드 운동은 “존 윔버 목사를 중심으로 빈야드 크리스챤 펠로우쉽에 소속된 교회와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표적과 기사를 통한 사역을 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존 윔버를 통해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1995년 현재 61세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시에 있는 ‘빈야드 크리스챤 펠로우쉽’ 교회의 설립 목사이며 국제 빈야드 사역의 회장”이다.

이 운동은 풀러에서의 ‘MC510:표적과 기사와 교회성장’이란 강의를 통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확산되어졌는데, 이 강의는 존 윔버가 목회현장에서 체험한 ‘표적과 기사’를 통한 교회성장을 와그너 교수가 지도하는 목회학 박사 과정에서 가르치도록 제안되어 1982년 1월에 시작된 것이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이 과목이 가르쳐졌으나 그후 4년간 중단되었다.

소위 ‘성령의 제 3의 물결’이란 표현이 이 운동과 함께 쓰이는데, 이 표현은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과 비슷한 운동을 가리키는 말로써, 자신들을 오순절주의자와 은사주의자로 동일시하기를 원치 않으면서 성령의 능력적 사역을 원하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운동에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제 3의 물결과 빈야드 운동은 함께 출발했고 함께 가고 있다.

1. 빈야드 운동
 (1) 그들의 문제 제기

이 운동에서의 중심되는 표어는 “능력전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전도 현장에서 당면하는 현실 특히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당면하는 현실을 “능력대결”이란 말로 표현하고, 능력대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전도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을 가리켜 능력전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멈추거나 마이너스 성장하는 것인데, 그 원인은  전도 또는 선교의 현장이 능력대결의 현장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으며, 그리하여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능력전도를 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한다. 

(2) 해결 방식

이같은 문제에 직면하여 이 운동은 능력대결의 현장을 바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능력전도를 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3) 성과 

능력전도를 함으로 전도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그동안 중단되거나 마이너스로 떨어졌던 교회성장의 곡선을 다시금 상승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2. 빈야드 운동에 대한 이의
우리는 우리와 다른 신앙사상이나 운동들에 대하여 무조건 정죄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기에 이 문제에 있어서도 신중하고자 한다.

(1) 문제 제기에 대하여

교회성장의 정체 또는 마이너스 현상에 대하여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능력대결”의 현장에 대한 둔감이나 “능력전도”를 하지 못한 데 있다고 말하는 데 대하여서도 그 나름대로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교회가 능력대결에 대하여 둔감하게 된 원인을 지적하는 데 대하여서는 이견이 있다. 먼저 그에 대한 이견을 간단히 언급하고 이어 능력대결과 능력전도에 대하여서도 말해보고자 한다.

먼저 교회현실이 능력대결에 대하여 둔감하게 된 원인을 주로 세대주의와 워필드에게서 들고 있는데, 그에 못지 않은 비중을 신학적 자유주의에게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내용에 대해서조차 문제를 제기한 것은 신학적 자유주의이다. 세대주의나 위필드 같은 신학자는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내용에 대하여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들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일들에 대하여 현대적 세계관이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라고 지적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럼에도 마치 하나님의 능력은 초자연적인 데서만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저들의 편협한 종교적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이들이 말하는대로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모든 현실이 “능력대결”의 현실인가? 이들이 “능력대결”이라고 말할 때에, 한편으로는 그 말에 수긍이 가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적용이 종교적 관심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복음적 신앙사상가인 쉐퍼를 인용하면서 이 문제점들을 비교 점검해 보고자 한다. 쉐퍼도 현실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처지를 “전투”로 말하고 있는데, 전투에 임하는 사고 자체가 윔버나 그의 동료들이 보다 외면적이고 부분에 치중해 있는 데 비하여 쉐퍼는 보다 총체적이다.

쉐퍼에 의하면, “성경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우주적인 규모의 싸움에 휘말려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는 참으로 우리가 이 우주적인 전투에 참전하고 있다고 믿는가?”라고 자문하고 있다. 쉐퍼는 영적 싸움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이 말이 종교적인데만 국한되지 않도록 주의를 요하고 있다. “영적 싸움이지만, 동시에 우리 나라, 우리 공동체, 우리 일터와 학교,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 가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싸움이다. 가시적인 세상과 인간들의 마음 속에서와 인간문화의 온갖 영역에서 천상적인 싸움과 대응되는 영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2) 해결방식에 대하여

이들은 능력대결의 현장을 제시하고 그 해결방식으로 능력시위를 통한 능력전도를 말한다. 그런데 과연 능력시위를 통한 “능력전도”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우리는 이 말에도 역시 한편으로는 공감하면서도 능력시위와 관계해서 어떤 주술적인 방식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쉐퍼는 위에서 말한 영적 싸움에 이기기 위하여서 “주술적인 방식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선행적인 위탁(a prior commitment)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행적인 위탁”이란 그리스도께 평생을 맡기는 것으로서 진리에 기초해서 의롭게 살며 복음에 터를 잡고 사는 삶을 가리킨다. 그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사고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행동의 영역에서도 우리 시대의 문화에 휩싸여 스스로 싸워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역설하였다.   

쉐퍼의 주장에 비하여 보면 이들의 운동은 현실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는 전면전(全面戰)을 단지 국지전(局地戰) 정도로 축소시키는 모습으로 보인다.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문화전반에 걸친 문제를 치유에 국한하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그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들을 단지 치유와 회복을 위한 기도 정도로 제한시키는 경향으로도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이 운동에 대해서 평가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운동이야말로 마치 최전방에서 백병전을 벌이고 있는 것인듯이 보인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경우를 고려하면 후방병원 정도나 심지어 아군을 교란시키는 적의 책동으로 보이기도 한다.      

윔버가 행동을 강조하는 만큼이나 쉐퍼도 행동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폭이 서로 다르게 보인다. 윔버가 보다 종교적인 데 치중한 것에 비하여 쉐퍼는 전포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쉐퍼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시라면, 그는 또한 생활의 모든 면에서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시인한다면 이 사실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은 쉐퍼의 표현은 개혁주의 신앙의 정석을 보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시종 일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날마다 주님과 함께 걷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 생활을 하고 일상생활에서 우리 주님의 사랑과 긍휼과 거룩함을 나타내 보일 필요성에 대해서이다.”

이에 비하여 볼 때, 윔버나 그의 동료들의 주장은 다분히 종교적 은사위주의 행동에 그 관심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의 가능성에 대하여 닫고 있다는 이유로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들 스스로가 계몽주의가 끼친 영향하에서 나온 경건주의적인 분위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3) 성과에 대하여

이 운동에서는 소위 “제 3의 물결” 이후에 이루어 놓은 괄목할만한 양적 성장을 그 성과로 내세우고 있다. 바로 이같은 눈에 보이는 놀라운 성과때문에 무언가 이 운동의 내용을 낯선듯이 여기는 목회자들조차도 주저하면서도 이 운동에 참여하게 만든다.

저들의 말대로 이같은 성장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과연 이러한 성장이 바람직한 성장인가 하는 데에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평가가 상이할 수 밖에 없다. 말씀만으로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서 믿는다고 한다. 종교개혁 당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견제되어 온 움직임들이 단지 ‘교회성장’이라는 이름아래 마치 제동장치가 풀린채 언덕에 세워놓은 차처럼 이렇게 굴러가도록 해도 좋은지 심히 의문스럽다.

지난 16세기 이래로 가르쳐져 온 대부분의 건전한 가르침들이 최근까지 그 건전성이 의심되었던 가르침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고 말았다. 저들은 말하기를 말씀만 가르쳐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시위해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 대하여 우리로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다음과 같은 말로 답하지 않을 수 없다.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렘 23:28).

3. 빈야드 운동의 배경과 조직신학적 입장에서의 평가
이 운동의 현상만 보아서는 당장에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배경과 뿌리를 살펴 보면 대강 그 가닥이 잡힌다.

(1) 퀘이커교적 배경

이 운동의 중심 인물인 존 윔버의 신앙과 신학의 배경은 퀘이커교적이다. 그는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Azusa Pacific Uni.)에서 성서신학 분야에 [학사]학위를 얻은 후 “1970년에 형제교단(Friends)에서 안수를 받고 그후 5년간 캘리포니아주의 요르바린다 형제교회(퀘이커교회)에서 협동목사로 봉사하였다.” 그의 아내 캐롤 윔버는 “하나님은 이상한 체험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퀘이커파에 속한 우리의 조그만 교회의 틀을 벗어나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글에서 그녀는 그들이 경험한 “전율과 진동” 및 “표적과 기사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에 대한 “예수의 친구들” 또는 “퀘이커들”의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퀘이커교는 “친우회(Friends)라고도 불리우는데, 17세기 중엽 영국과 미국 식민지에서 생겨난” 기독교 단체로서 “신조나 목사, 그밖의 교회적인 형식들이 없이 하나님을 내적으로 직접 받아들임으로써 생을 헌신”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내면의 빛(the Inward Light)’에 대한 신뢰가 가장 중요한 주제인데, 이 빛은 양심이나 이성과 혼동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직접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모든 인간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빛이다. 이 빛이 양심을 깨우쳐서 다시 이성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한다.

개혁신학자 바빙크는 종교적 개인주의에 대해서 철저히 비판적이었는데, 그는 종교적 개인주의의 절정을 퀘이커교에서 보았다. 그에 의하면 퀘이커교가 생겨날 즈음의 시대는 영국에 있어서 시민전쟁의 시대였는데, 종교적으로 신학적으로 큰 혼란의 시기였으며, 그 때문에 다양한 사상들과 경향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심지어 종래에 이단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지던 것조차도 기독교의 한 분파 정도로 간주되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종교적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가운데 알미니안적이고 침례교적이며 천년주의적이고 반율법주의적이며 자유사상적인 것들조차도 제각기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정신의 절정으로서의 퀘이커교 안에서 전통과 고백과 교회연합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성경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그 자신 안에, 영 안에, 내적인 빛 안에 자신의 종교적 생활과 지식의 원천을 소유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모든 객관적인 것 즉 성경, 그리스도, 교회, 직임, 성례는 도외시되었다고 한다.             

윔버는 여러 경우에 있어서 자신이 이전의 신앙적 전제로부터 새로운 세계에로 눈을 떴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가 가졌던 이전의 신앙적 전제가 개혁주의적인 것은 결코 아니며, 이후에 전개되는 모든 활동에서 이전에 그가 속해 있었던 퀘이커교와의 연속성을 분명히 보게 된다.

(2) 성경관

위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하여서는 세대주의나 워필드나 존 윔버 같은 이들이 그 입장을 같이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형식에 있어서는 같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제 각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성경관에 대한 신앙고백은 공유한다 할지라도 그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한 가지 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 존 윔버의 아내 캐롤 윔버가 기록한바에 의하면, “어느 주일 아침 집회가 끝나갈 무렵, 죤은 사역을 위해 더욱 큰 능력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신발을 벗게 한 다음, 레위기 8장 말씀에 따라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속 엄지가락, 그리고 오른발 엄지가락에 기름을 발랐다”고 한다. 그렇게 한 후 존은 병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였고, 자신이 방금 성별한 그 사람들에게 기도를 받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치유받았다고 한다.

이런 식의 성경말씀 적용은 전혀 개혁주의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윔버는 같은 책의 후기에서 “제 3 의 물결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로서,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개혁신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고 쓰고 있다. 윔버의 말대로 다수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과연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거니와 그의 말대로 과연 그렇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잘못 믿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다.

윔버의 말대로 다수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과연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들은 그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로 자처한다 할지라도 더이상 개혁주의자들이 아니며, 개혁주의 전통의 신앙고백을 한다 할지라도 내용은 이미 개혁주의적이 아니다. 이같은 현상은 자신의 전통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 가운데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대로 오늘날에도 반복될 수 있다고 믿어야 제대로 믿는 것인가? 아니면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서 성경이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을 중요한 정보를 주는 동시에 그 기록이 주는 계시적인 의미를 깨달아 알도록 하는 것인가? 성경이 갖는 계시적인 성격을 간과한채 단순히 그 가운데 기록된 내용의 현재적 반복에 치중한다는 것은 웬지 성경의 의미를 단순화 내지 미신화하는 감이 없지 아니하다.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 증거가 두드러진 경우이다. 이 밖에도 그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는 미묘한 문제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직접 경험을 통하여 그 말씀들을 확증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말씀에 의한 말씀 해석이나 성령의 조명에 의한 말씀 이해의 여지는 매우 희박하게 된다. 이들은 종래의 재세례파나 광신자들처럼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를 말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제로 적용하는 방식은 그들과 별반 다를바 없이 느껴진다. 

오늘날의 변질된 성경관에 대한 염려에 있어서는 윔버나 쉐퍼 둘다 공통적이다. 윔버 쪽에서는 초자연주의를 포기한채 자연주의적으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현대 전반과 초자연주의를 말하면서도 자연주의적으로 살고 있는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그에 비하여 쉐퍼 쪽에서는 성경관 속에 침투해 들어온 세상적인 견해와 그것이 끼친 경향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쉐퍼는 바람직한 성경관을 초자연주의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창조세계 전반으로 확대 적용하는 데 비하여, 윔버는 초자연주의에만 치중하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로서는 초자연주의냐, 자연주의냐를 대립시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연까지도 포함한 초자연주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3) 성령관

이 운동에 있어서 성령 이해는 사도행전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구속사에서의 특별한 시기와 관련하여 성령의 역사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이 때에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겠으나, 정상적인 성령이해는 성경 전체로부터 얻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삼위 중 일위이신 성령께서는 창세전부터 계셨고, 거룩한 예언의 영으로서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칼빈은 “만물이 예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을 성경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 말은 마치 성령은 어디서나 동일하시고 자신과 일치하시며 만사에 시종일관하셔서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된다는 말과도 같다”고 응수하였다. 이어 그는 “만일 성령이 인간이나 천사, 혹은 어떤 다른 무엇의 규범에 따라 판단된다고 하면 틀림없이 성령은 그 지위에서 격하될 것이며, 또한 그렇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성령은 노예상태에까지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성령이 “그 자신과 비교되고 자신 안에서 고려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손상을 입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한다.  이렇게 말함으로 그는 철저히 성경 중심으로 성령을 이해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말하는 성경은 비단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칼빈은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하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은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윔버나 그의 동료들은 성령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의 전체적인 진술에 그다지 매이지 않는듯이 보이며 그들이 간증하는 수많은 내용들도 필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그 말씀으로 제대로 자신을 단속하지 않고 영적인 현상들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로 자신들을 노출시켰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각양 영적 현상들로 보여진다. 윔버와 그의 교회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 “1981년 어머니날 주일 저녁 집회”에 초청된 아프리카 출신의 “젊은 연사”가 누구인지? 또한 그날 밤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그 일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일인지에 대하여 존 자신이 고민하고 있을 때에 콜로라도 덴버 시에 사는 친구 목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그래, 나다, 존”이라는 응답을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다분히 신비주의적이다.

칼빈도 성령이란 말의 사용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아주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것을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누가 말씀을 흐려놓는 것을 듣게 될 때면 언제나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그가 의도하는 바를 그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며, “만약 그가 핵심을 건드리지 않고 뱀이 그 꼬리를 꼬듯이 그의 말을 비틀면 숨어 있는 은신처로부터 도둑놈이나 범인을 끌어내듯이 ... 그를 빛 안으로 끌고 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특히 성경과 관계하여 성령의 증거사역을 강조하였는데, 이 때 말하는 성령의 증거란 “사람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는 역사이지, 어떠한 새로운 계시를 성경 이외에 시여하는 운동이 아니다.” 이같은 칼빈의 생각은 기록된 계시의 말씀에 대한 그의 분명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로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대로의 내용을 믿는 것과 성경에 기록된대로 재현되게 될 것을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4) 성과나 성취 위주의 실용주의적 정신

현실을 사는 인간으로서 일에 있어서 성과나 성취를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성경조차도 그런 기준으로 다 해석할려고 할 때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런 식의 논리로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죽음과 히브리서 11장 후반부에 나오는 성도들의 순생의 삶에 대해서는 설명해 낼 수가 없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표적과 기사를 민간에 행하였던” 사람이다. 그러던 그가 한번의 설교 후에 돌에 맞아 죽게 되고 말았다.

성과나 성취 위주로 그의 삶을 가늠할 수 없다. 히브리서 11장 후반부에 언급된 성도들은 전반부에 언급된 성도들과 똑 같은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겪어야 했던 현실은 “악형”을 받거나, “희롱과 채찍질”을 당하거나,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도 당하였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기도 하였다. 이 땅에 이러한 성도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 동안은 성과와 성취 위주로 성도의 삶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고 본다.

참된 능력이란, 외적 조건에서 우세를 확보하는 것만이 아니라, 외적 조건에서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변함없이 꿋꿋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여기에 현세만 보는 세상의 평가와는 다른 내세를 바라보는 교회다운 평가가 설 자리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평가방법이 있어야 비로소 순교자들이나 실패적 환경을 통과하는 성도들에 대하여 말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5) 신앙내용이나 생활에 있어서 중심의 이동

박윤선 박사는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가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다분히 근본주의적으로 가고 있는 데 대하여 염려하면서 “교리적 균형”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같은 주장에 비추어 볼 때 이 운동은 “능력대결”과 “능력전도”라는 기치 아래 균형을 상실한채 한쪽으로 치우친 감을 배제할 수 없다. 주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에는 다양한 말씀을 통하여 다방면에 참되게 알고 순종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일텐데, 여기서는 말씀의 풍성한 내용에 대하여서 보다는 치유사역과 영적 현상에 우리의 관심이 온통 쏠리게 만든다.

이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복음주의”라고 하며, 심지어 개혁주의와 별반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개혁주의의 주선(主線)이 지켜온 관심과는 거리가 멀게 여겨진다.

우리로서는 성경에 기록된 이적과 기사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현대정신에 편승한 현대신학이 그 사실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심지어 부인하였다. 우리는 이적과 기사의 현재적인 가능성에 대하여서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의 중심을 이적과 기사에만 두게 될 때, 우리로서는 문제를 느끼게 된다. 중심이동에서 오는 불안감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왜 굳이 그것을 강조해야 하는가? 이런 경향은 마치 성령에 대한 새삼스런 강조와도 같다. 우리는 성령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령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에는 문제를 느낀다. 성령의 존재와 활동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성령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서도 안된다. 성령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적절한 내용과 자리가 있고, 그것을 지켜야 할 것이다. 이적과 기사의 현재적 실현 가능성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서도 안된다. 그것의 적절한 내용과 자리가 있고, 그것을 지켜야 할 것이다. 

4.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그에 대한 대안

(1) 보다 근본적인 문제

이 문제에 있어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개혁신학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았다는 것과 현시대가 지나치게 초교파적인 분위기를 선호하고 있다는 데 있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윔버의 말대로 다수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과연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들은 그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로 자처한다 할지라도 더이상 개혁주의자들이 아니며, 그들이 비록 개혁주의 전통의 신앙고백을 자기의 것으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이미 개혁주의적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이같은 현상은 자신의 전통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 가운데서만 가능한 일이다. 개혁교회가 전반적으로 그 힘을 상실하고 개혁교회에 속한 교회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신앙적 유산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무지하게 된 시대에야 비로소 있을 수 있는 일들이 지금 우리 눈 앞에 전개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죤 윔버가 케이커교 출신으로서 복음주의적이기를 원하며, 심지어 개혁주의적이기를 노력하는 일에 대하여는 귀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바람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술이 아직은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빙크는 그의 교의학에서 이러한 시대의 도래를 이미 예견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구프린스톤의 신학조차도 역사적 개혁신학이 이미 그 힘을 상실해 버린 상태에서 조금 회복해 볼려고 몸부림치는 정도로 묘사하였다.

종교개혁 신앙의 분명한 전통 가운데서 보면 그 명암을 확실히 밝힐 수 있는데도 이제는 더이상 그런 분별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개혁신학의 전통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쉐퍼는 미국의 복음주의가 이름만 거창할 뿐이지 사실상 불꺼진 등이요 맛잃은 소금임을 탄식하고 때로는 통렬히 비난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형편이기에 오늘날과 같은 영적인 무분별과 혼동 현상이 가능한 것이다. 쉐퍼의 해석과 진단을 빌어 오늘날의 현상을 진단한다면, 지난 40-60년 동안 우리 문화를 중심으로 진리와 도덕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복음주의자들의 세계에 속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싸움에 적극적이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런 싸움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융통성을 발휘하고 말았는데, 그 결과로 영적 분별력이 상실되어 버리고, 영적 전투 능력이 소멸되어 오늘날과 같은 영적 무분별의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다음과 같은 쉐퍼의 우려가 오늘 우리에게 현실화 되고 있는 느낌이다: “전 세계와 미합중국을 통해서 복음주의자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의 수효가 늘어갈지는 몰라도, 복음주의는 강력한 성경관에 있어서 일치한 노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이 ‘참으로’ 복음주의자들이 되려면 결코 성경관에 있어서 타협을 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복음주의가 외형적으로 점점 더 커진다 할지라도, 복음주의자들의 상당부분이 성경관에 있어서 동시에 타협적이 되어 버린다면 외형적 증거는 무의미하다.” 빈야드 운동이 영적 종교적 관심을 부추겨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 운동에 동원된다 하더라도, 더 이상의 영적 분별력은 지니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기독교 종교에 있어서 은사적 측면에 있어서는 그 주도권을 넘겨주는듯 하면서도 여타의 모든 부분에 대하여서는 그것에 심취해 있도록 하므로써 분별할 수 없도록 만든다면, 이것이 과연 건전한 가르침일까?

오늘날은 ‘선교’라는 이름아래 더이상 출신교단을 따지지 않게 되었다. 피선교지에서 무엇을 가르치는가는 더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예수 - 구원’ 식의 극히 단순화된 복음만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같은 분위기에서는 종교개혁 신앙의 전통에 대한 강조는 오히려 번거로운 것에 불과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평화로운 공존을 깨뜨리는 분열의 위험이 있는 것으로 지목된다.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 풀러(Fuller)에서의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에 의한 초교파적인 선교에 대한 강조와 성장에 대한 일방적인 관심 가운데서만 오늘날과 같은 현상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 현상이란 전혀 다른 전통의 것이 복음주의란 이름 아래 개혁주의와 유사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을 가리킨다.   

(2) 그에 대한 대안

개혁신학의 전통을 제대로 전수하여 우리의 신앙적 분별력을 높여야 하겠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우리 시대는 개혁신학의 전통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아 건전한 신앙유산에 대하여 전반적인 무지에 처해 있다. 개혁신학의 전통을 힘써 발굴하여 우리가 이어가야 할 바 건전한 가르침에 견고히 서서 영적 분별력을 확보해 나가야 하겠다. 이 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나친 분열때문에 오는 힘의 분산을 극복하고 같은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단이나 교파간의 연합이 절실히 요구된다. 

또한 복음전도 또는 선교란 이름아래 무분별하게(신앙고백을 개의치 아니하고) 통용되는 초교파적 분위기에 대하여서도 그 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타교파를 정죄하자는 것이 아니다. 굳이 연합을 해야 할 때에라도 교파의 특성들에 대한 이해와 그 강약을 알고 그 취약점에 대하여서는 주의하면서 연합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 사이에는 분명 작지 않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도의 신앙유산을 전수해 온 교파일수록 그 손실이 클 것이며, 전반적으로 질적저하 현상을 낳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유의 운동에 대하여 생각을 닫지 말고 열어 놓을 필요는 있다고 본다. 이 운동에서 주장하는 그러한 현상들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땅 위에서의 신앙생활의 의의가 무엇인가? 성취와 성공인가? 성도의 성화가 아닌가? 성취와 성공의 실용정신에 삶의 우선순위를 빼앗겨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기록계시의 의의를 바로 알고 성경을 바로 사용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사건을 반복시킬 목적이 아니라, 교훈의 전승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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