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이단&이슈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본 관상 기도
합동측 96회 총회 ‘관상기도 운동’ 연구논문
2011년 11월 06일 (일) 23:14:22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2011년 장로교단 9월 총회, 이단사이비 관련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는 관상기도였다. 예장 합동측이 관상기도에 대해 “어떠한 교류도 삼가며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결의한 데 이어, 예장 합신측 역시 관상기도 운동과 레노바레 운동에 대해 “참여하지 말 것”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양 교단은 각각 “이단(사이비)피해대책조사위원회에 회부하여 계속 연구토록 함으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 위험성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이들 운동에 대한 충분한 연구자료가 부족한 것이 교계 현실이다. 이에 독자들의 구체적인 이해를 돕고자 양 교단의 총회보고서에 첨부된 관련 논문 전문을 하나씩 게재한다. <편집자 주>


라영환 / 명지대 교수

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교회 내에서 목회자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관상기도에 대해서 개혁신학적인 입장에서 검토해 보는데 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시작된 관상기도는 한국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도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다. 목회자들 가운데 일부는 관상기도를 통한 내적인 변화가 물량주의나 성장주의 혹은 개교회주의 등 한국교회의 고질적 병폐를 치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관상기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관상기도가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플라톤 철학과 동양의 신비사상에 기초한 것이기에 이를 배척해야 한다고 본다.

관상기도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관상기도가 북미의 여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Talbot School of Theology, Denver Seminary)에서 폭넓게 수용되었으며, 한국에서도 예장통합과 감리교 그리고 기장과 같은 교단에서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관상기도를 둘러싼 이러한 상반된 견해들은 관상기도에 대한 신학적인 점검이 시급함을 보여준다.

미로즐라브 볼프(Miroslav Wolf)의 “신학자들이 신학교에서 신학을 논의할 때에 교회는 다른 곳에서 그 대답을 찾으려고 한다.” 1) 는 지적은 오늘날 신학이 일반 신자들의 삶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해마다 수많은 논문들과 연구물들이 나오지만 그러한 글들은 대부분 소수의 학자들에게만 읽혀질 뿐이다. 아마도 그것은 신학자들이 다루는 내용들이 신자들의 삶과 다소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재 한국교회 내에서 그 의견이 첨예하게 나뉘어져 있는 관상기도라는 주제를 신학적으로 점검해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일반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의 경우 관상기도에 대한 정보를 대부분 서적을 통해서 얻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들이 접하는 서적들이 관상기도를 지지하는 내용들이어서 이 주제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뒤늦게나마 관상기도에 대한 신학적인 검토를 하는 것은 관상기도에 대한 혼란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다행히도 최근에 관상기도에 대한 신학적인 검토를 하려는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도들로 인해 관상기도의 문제점들이 부각되어 일반 목회자들이 관상기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목회자들 가운데는 관상기도운동이 한국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고 보고, 가톨릭적인 것을 배재한 복음적인 관상기도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들은 관상기도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이 그것이 가톨릭 전통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가톨릭교회와 신학이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쳐 왔다고 우리가 그것까지 외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2)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관상기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그것이 가톨릭적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관상기도 자체가 가진 문제점 때문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결국 관상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본고는 먼저 ‘관상’이라는 그리스용어가 기독교로 수용하고 발전되는 과정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현대 관상기도운동의 창시자인 토마스 머튼과 토마스 키팅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면서 관상기도의 뿌리가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사상에 있음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현대 관상운동의 실천이 상당부분 동양의 명상법을 차용하였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관상기도의 문제점을 제시할 것이다. 신론과 기독론 구원론에 있어서 정통 기독교 교리와 상충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특별 계시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종교 다원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점이 부각될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 관상기도의 복음적 적용은 불가능하며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관상이라는 용어 대신에 개혁교회 전통 안에 있는 기도를 재조명하고 확산 시킬 것을 강조할 것이다.

1. 그리스철학 전통에서의 관상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체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3) 이 단어는 그리스어 테오리아(θεωρια, 관상)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그리스 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이다. 그리스철학에 있어서 관상(θεωρια)이란 인간이 자신의 기원과 목적지인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앎을 위해 일자(一者, the one)를 바라보는 행위를 의미한다. 4) 그리스철학자 가운데 관상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플라톤(Platon, B.C. 428~B.C. 347)이다. 플라톤의 인식론에 있어서 관상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플라톤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참된 지식에 이를까를 고민하였다. 그에 의하면 참된 지식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식의 대상 역시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감각적인 세계는 가변적이라 참된 지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유한하고 가변적인 세상 속에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플라톤은 형상계라는 개념을 끌어 들인다. 그는 사물의 ‘감각적인 세계(appearance)’와 별도로 ‘형상계(essence)’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형상계는 변함이 없고 영원한 곳으로 사물의 원형이 있는 곳 일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세계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곳이다. 5) 문제는 감각적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끊임없이 생성, 소멸, 그리고 변화하는 감각적인 현상들 밑바닥에 놓여있는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느냐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그에 의하면 동굴이란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를 의미한다. 그는 인간은 마치 동굴 안에 쇠사슬에 묶여진 채 한쪽 벽만 응시하고 살아가는 죄수들과 같아서, 동굴 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해서 맺혀진 상(像)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들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자신들 눈앞에 보이는 상들이 사물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마치 그것들이 사물의 본질인양 생각 한다. 그런데 그 죄수들 가운데 하나가 우연히 동굴 밖에 나가 그들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사물의 그림자이지 사물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동굴 안에 들어와 그 동안 자신들이 보던 것이 사물이 아닌 그 사물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비유의 줄거리이다.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인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은 인간이 바라보는 감각적인 세계는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모상(模像, 복제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세계를 그는 현상(phenomenon)이라고 한다. 6)

이제 플라톤에게 제기된 문제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감각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참된 본질을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형상계와 감각적인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영혼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 혹은 형상계에 있다가 감각적인 세계에 들어오면서 망각의 강을 건너왔다고 믿었다. 7) 플라톤에 의하면 망각의 강을 건넌 인간의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에서의 일을 다 잊어버렸지만, 영혼은 순간적으로나마 포착했었던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이 기억만이 인간에게 감각에 의해서 왜곡되지 않은 참된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영혼의 회상을 통해서 그의 궁극적 질문이었던 변화무쌍한 감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유한한 인간이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발견한다. 그에게 있어서 참된 지식은 오직 영혼이 옛날에 알고 있었던 것을 회상함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참된 인식은 회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회상이란 동굴 안에서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그림자를 숙고하는 것이 아닌 감각적인 것에 의해서 오염된 영혼이 동굴 밖으로 나와서 태양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동굴 밖으로 나온 인간은 처음에는 빛 때문에 실재의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본질을 파악 하게 된다. 인간이 동굴 밖으로 나와 이데아의 세계를 ‘바라봄(θεωρια, 관상)’으로서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플로티누스(Plotinus, A.D. 204~270) 에게도 계승이 된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관상을 지성 최고의 활동으로 보았다.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다는 논리에 근거해서, 플로티누스는 인간은 실재(reality)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전통을 따라 플로티누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데아의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절대적인 선과 접촉하고 그와 합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있어서 관상이란 인간이 일자)를 바라봄으로써 그 일자에 가까이 가거나 혹은 동화할 수 있는 활동이었다. 8) 관상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은 실재 혹은 일자로 충만해지게 되고 일자와 연합하게 된다. 관상을 통해서 참된 지식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플로티누스의 주장은 중세 신비주의운동 및 현대 관상주의운동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모든 것이 일자로부터 나와서 다시 일자로 돌아간다. 만물의 근원인 일자는 본성적으로 모든 것을 방출해 낸다. 그러나 이러한 유출에도 불구하고 일자는 그 자체로서 결코 감소하지 않으며, 따라서 유출은 시작도 끝도 없는 행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감각적인 혹은 물질적인 세계의 다양성은 일자로부터 하향적으로 범람한 결과이다. 일자는 필연적으로 자기 충만에 의해 범람하게 되고 이 범람은 물질적인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 단계를 점점 낮추어 간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통일성으로부터 다양성에 이르는 일자의 하향적 운동이다. 일자로부터의 유출이 아래로 내려 갈수록 일자의 단일성은 더 옅어지고 다양성은 더 짙어진다. 유출의 마지막 단계는 물질세계이다. 이곳은 절대 단순성으로부터의 유출의 전 과정이 점차 없어져 가는 곳이며, 일자와 관련하여 가장 적은 통일성과 가장 많은 다양성이 있는 곳이다. 9)

플로티누스는 개별적인 인간 영혼이 이러한 물질과 접촉하면서 오염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은 높고 높은 통일성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 자신을 정화시켜야 한다. 이 정화는 플라톤이 <파이도스>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영혼의 순화 혹은 덕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10) 이러한 정화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은 자신이 일자로부터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감각적인 세계를 향했던 관심을 일자에게로 돌리게 된다. 이것이 다양성에서 보다 높은 통일성으로 향한 상향적 운동이다. 이러한 상향적 운동은 인간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 물러서서 자기를 바라봄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인간이 관상을 통해서 감각적인 세계를 벗어나 사물의 본질에 참여하게 된다고 보았다. 11) 관상을 통해서 일자에 대한 궁극적인 통찰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의 연합에 이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플로티누스의 이론은 중세 신비주의운동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중세 신비주의운동에서의 관상


관상에 대한 플로티누스의 견해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에게 전수된다. 클레멘트는 ‘하나님을 바라봄’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의 저서 <스트로마타>(Stromata)에서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12) 기독교적 영지주의를 주장했던 클레멘트는 영지자 삶의 목표는 철저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gnosis)의 목표와 열매도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클레멘트는 플로티누스의 영혼의 상승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현세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라고 보았다. 13) 믿음은 실재(reality)에 대한 훈련되지 않고 열등한 반응이었다. 그는 믿음은 구원의 지식에 대한 텅 빈 지식 혹은 해골과 같은 것이며, 참된 지식(gnosis, 영지)만이 우리가 믿음으로 받았던 골격과 같은 지식에 살을 채우게 한다고 보았다. 14) 클레멘트에게 있어서 이러한 참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봄을 통해서, 즉 하나님을 관상함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과 지식에 대한 클레멘트의 구분은 전적으로 플라톤 철학에서 온 것이다.

“믿음은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간결화 된 지식이다. 그러나 지식은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한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증거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교에서 믿음으로 옮겨가는 첫 번째 종류의 변화가 있고, 다시 믿음에서 지식으로 옮겨가는 두 번째 종류의 변화가 있다. 그리고 이 지식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단계에 이른 자는 이미 천사들과 동등하게 된다. 이렇게 육신에 있어서 최종적인 상승에 이른 후에 계속 전진하여 헤브도마드(Hebdomad) 15) 를 거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16)

여기서 우리는 클레멘트의 지식에 대한 견해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지식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단순히 믿기만 하는 단계는 수련이 덜된 초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지식은 관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의 것이라는 그의 견해는 스토아 철학에서 그대로 기독교로 옮긴 것이다.

클레멘트의 영향을 받은 오리겐(Orineses, 185~254)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순례라고 보았다. 오리겐은 영혼은 ‘윤리적 단계’(ethike), ‘자연을 관상하는 단계’(physike), 그리고 ‘하나님을 관상하며 상승하는 단계’(enoptike)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말하는 윤리적인 단계란 플라톤이 <파이도스>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육체의 정욕을 죽이는 단계를 말한다. 그리고 자연을 관상하는 단계는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세상을 초월하려는 것을 소망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단계의 목표는 육신을 영혼에 순응하게 한 후에, 육신으로부터 영혼을 해방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해방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관상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17) 이러한 관상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being like God or being deified) 된다. 오리겐은 인간의 영혼은 ‘되어짐의 세계 혹은 변화의 세계’(The world of becoming)로부터 일어나 ‘존재의 세계’(the realm of being)로 들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도약은 오직 영지적인 그리스도인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18)

여기서 우리는 오리겐의 관상에 대한 주장들이 성경보다는 플라톤주의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순례라고 본 오리겐의 주장은 플로티누스의 영혼의 상승이라는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게 보인다. 플라톤이나 플로티누스에게 있어서 영혼이 이데아 혹은 일자와 동족(同族)관계에 있는 것과 같이, 오리겐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동족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플로티누스가 영혼이 자기가 일자로부터 유출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관심을 일자로 돌린 것과 같이, 인간의 영혼이 관상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상승운동을 한다고 보았다. 앤드루 라우스(Andrew Louth)는 오리겐이 비록 플라톤의 사상에 빚을 지고 있지만 철학보다는 성경에 바탕을 두었다고 보았다. 19)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관상기도가 그리스철학에 근간을 두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주장이다. 오리겐에게 있어서 성경은 그가 신플라톤주의로부터 받았던 사상을 증명하기 위한 지지본문(proof text)로서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오리겐이 관상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마주보고 그분과 연합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관상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이 일자와 연합할 수 있다는 플로티누스의 주장과 너무 유사하다. 성경은 이 세상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리겐에게 있어서 영혼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족관계이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보다는 신플라톤주의에 더 가까운 것이다. 성경은 오리겐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과 본성상 유사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봄(관상)을 통해서 신적인 영역에 복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보았을 때 오리겐의 관상에 대한 이해는 플라톤의 앎의 여정을 기독교적으로 적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세 신비주의 형성에 있어서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5)를 빼놓을 수 없다. 그레고리의 관상의 특징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분이지만 만물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시고, 영혼은 ‘알 수 없음’이란 어둠 속에서 거울에 비친 하나님을 관상할 수 있다는데 있다. 20)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그것은 영혼이 거울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과 ‘먹구름’(dark cloud)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영혼이 거울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은 영혼이 비록 하나님을 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알 수 없는 분으로 남아 계시기에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본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먹구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관상을 통하여 보이는 감각 세계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되어, 이성이나 감각에 의해서 파악될 수 없는 하나님의 현존을 어둠 속에서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21) 영혼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그레고리의 관상에 대한 이해는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오리겐과 마찬가지로 그레고리는 영혼의 상승이라는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관상과 연결시켰다. 그레고리는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모상성이 있으며, 이 모상성으로 인하여 영혼은 자신의 원천인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주장은 플라톤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에바그리우스(Evagrios of Pontus, 345~399)는 오리겐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나아가는 길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그는 오리겐이 영혼이 나아가는 길을 윤리적 단계, 자연을 관상하는 단계, 그리고 하나님을 관상하며 상승하는 단계로 구분하였던 것과 달리 ‘실천학 단계’(praktike), ‘자연을 관상하는 단계’(physike), 그리고 ‘신학의 단계’(theologia)로 구분하였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실천이란 육체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연을 관상하는 단계는 침묵을 통하여 육체의 소욕을 억제한 후에 창조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관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단계에 이르러 영혼은 ‘아파테이아’(apatheia)에 이르게 되는데, 이 상태에 이르게 되면 영혼은 세상의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평온상태’에 도달한다. 이 평온의 상태에서 영혼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배후에 있는 비 물질적인 원리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신학의 단계에서 영혼은 하나님을 관상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 인간의 영혼은 스스로 관상하는 대상과 하나가 된다. 22)

관상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이 관상하는 대상인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에바그리우스의 견해는 플로티누스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플로티누스의 말을 빌리자면 일자와의 연합성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인간은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지만 피조물일 따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성한 삶에 참여케 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 관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동족관계에 있다는 플라톤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중세 신비주의운동의 관상과 관련하여 빼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하나 더 있는데 그가 바로 위-디오니시우스 (Dionysius the Areopagite or Pseudo- Dionysius)이다. 23) 위-디오니시우스에게 있어서 관상이란 신적 어두움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보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신적 어두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적 어두움이란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있는 도달할 수 없는 빛이다. 이는 아무 흠도 없는 그분의 맑음으로 인해 가까이 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바로 하나님을 관상하고 알게 되는 자격을 갖춘 자들이 도달하는 곳으로, 보는 것과 아는 것을 초월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곳이다.” 24)

위-디오니시우스는 모든 존재와 지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감각되고 인식되며 이해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포기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은 모든 것을 초월한 신적 어두움의 빛에게도 갈 수 있게 된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정화’(purification), ‘조명’(illumination), 그리고 ‘완전’(perfection)에로 나아가는 상승적인 과정으로 보았다. 위-디 오니시우스가 말하는 정화란 인간이 신비적 관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감각적이며 관념적인 지식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정화는 부정신학 25) 에서 말하는 앎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는데, 이 앎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한다. 26)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것은 긍정적인 개념들과 사고들로부터 벗어나서 거룩한 어두움을 뚫고 지나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하나님께서 비춰주시는 빛(illumination)을 받아야 한다. 인간은 관상을 통해서 이 빛을 받게 된다. 이 빛을 받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세계에서의 모든 인식을 버리고, 모든 감각 기능을 멈춘 후에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이 침묵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지성이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는 어두움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27)

이러한 위-디오니시우스의 주장에서 우리는 클레멘트와 오리겐 그리고 그레고리와 에바그리우스로 이어지는 신플라톤주의에 기반을 둔 관상의 전통이 위-디오니시우스에서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된다. 위-디오니시우스에 의해서 만개된 관상에 관한 이론은 중세후기 신비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8) 그가 세계를 근원으로부터의 유출로 보고 영혼의 상승운동을 통해 신(혹은 일자)과 합일할 수 있다는 주장은 플로티누스의 유출설과 영혼의 하강과 상승운동에 관한 이론을 단지 기독교적으로 적용한 것뿐이다. 유출설에 근거한 창조론은 성경에서 말하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닌 범신론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위-디오니시우스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을 관상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계시 의존적인 개혁주의 인식론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깊이 파고 들어감을 통해서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신적 계시가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이다. 부정의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위-디오니시우스의 주장은 성경이 아닌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영혼이 부정의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연합하게 되며, 이 연합을 통하여 스스로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위-디오니시우스의 주장은 개혁주의 인간관과 구원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관상

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발전되었던 중세 신비주의운동에서의 관상은 중세후기에 오면서부터 점점 약화되어 수도원에서만 그 명맥이 유지되어 오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29) 중세 신비주의의 관상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과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 1923~)에 의해서이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이란 “눈부신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0) “진정한 묵상으로 일어나는 일은 창조된 인간의 내적 실체와 하나님의 무한한 실체가 접촉하는 것입니다.” 31) 관상을 통한 신과의 일치라는 머튼의 주장은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신과 동족성을 가지고 있어서 본성적으로 감각적인 세계를 떠나 신에게로 회귀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관상이란 인간의 영혼이 신에게로 회귀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관상 기도와 관련한 머튼이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들을 살펴보면 철저하게 플라톤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머튼은 “관상이란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존재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이며 무한히 풍요로운 ‘원천’의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32) 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머튼의 주장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동족관계에 있다는 플라톤주의의 주장을 기독교적으로 적용한 것뿐이다. 머튼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정통 기독교신앙과 대치되는 것이다. 33) 이러한 머튼의 견해는 결국 무로부터의 창조를 부인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뿐만 아니라 머튼은 플라톤주의의 전통을 따라 인간이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존재론적인 일치를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내면의 ‘나’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므로 그 ‘나’가 깨어나면 자기 안에서 임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표현을 초월하는 역설로, 하나님과 영혼은 단일한‘나’처럼 보입니다. 둘은 하나님의 은혜로 단일한 인격체처럼 됩니다. 둘은 하나처럼 호흡하고, 살고 행동 합니다. ‘둘’가운데 ‘어느’ 쪽도 객체가 아닙니다. 34) ‘감각의 어두운 밤’이라고 하는 이것은 신비적 묵상으로 넘어가는 평범한 문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더 깊고 무서운 밤, ‘영의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두 밤은 두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전자에서는 겉사람이 죽고 다시 살아나 속사람이 됩니다. 후자에서는 속사람이 죽고 다시 살아나 하나님과 연합하는데, 이는 둘이 하나 되어 형이상학적 구분 외에는 둘을 전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연합을 뜻합니다.” 35)

머튼은 관상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혹은 내적 자아)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단일한 인격체와 같이 되어, 형이상학적 구분 외에는 둘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연합을 이룬다고 하였다. 정말 우리가 머튼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인 일치를 경험할 수 있을까? 하나님과 연합을 통해 존재론적 결합을 이야기한 머튼과 달리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신자들이 신적인 본성을 갖는 것이 아니며,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고 본다. 36)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존재론적인 결합을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머튼은 어떻게 하면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이 자신의 근원인 하나님과 일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플로티누스의 영혼의 상승운동을 통해 대답한다. 머튼은 묵상의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인식’이란 현존하되 거의 자의식이 없는 인식입니다. 이는 일종의 부정적 인식이요 ‘무지’를 말합니다. 유사-디오니시오의 고전적 표현에 따르자면 인간은 하나님을 ‘모름’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개념을 초월한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그분께 다가갑니다. 그리고 묵상 할 줄 아는 것을 잊음으로써 묵상합니다.” 37)

이러한 머튼의 생각은 이미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플로티누스의 부정의 방식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플로티누스의 부정의 방식을 통한 인식이라는 생각은 그레고리를 지나 위-디오니시우스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는데, 이것이 머튼에게 전수가 된다. 머튼에 의하면 인간은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38) 그가 말하는 무지의 어두움이란 ‘인간의 사고와 갈망이 끝나는 곳’을 말한다. 39) 이러한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과의 접촉이 이루어진다는 머튼의 주장은 인간의 모든 인식이 멈춘 그곳, 인식을 통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실재를 경험하게 된다는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근거로 한 것이다. 40)

토마스 키팅은 관상기도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1) 키팅의 관상기도에 관한 견해는 앞서서 살펴본 클레멘트, 오리겐, 그레고리, 에바그리우스, 위-디오니시우스, 그리고 토마스 머튼과 유사하다. 관상에 대한 키팅의 견해는 머튼과 마찬가지로 플라톤주의에 그 기원을 둔다. 42) 그 역시 머튼과 마찬가지로 관상기도의 목적이 하나님과의 합일에 있다고 보았다. 43) 키팅의 관상기도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관상기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이다. 키팅은 관상기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소개하는 이유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양에서 밀려온 도전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서구에서 요가나 명상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자 이를 기독교적으로 적용할 필요성을 느껴 기독교적인 관상기도의 전통과 동양의 묵상방법들을 결합하였다. 44)

키팅은 ‘관상의 상태’(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centering prayer’(향심기도)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45) 그에 의하면 향심기도(관상기도)는 관상상태에 이르는 과정으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46) 그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마련한 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아야 한다고 말한다. 47) 그리고 마치 동양종교에서 우리의 모든 기능을 한데 모아 하나님께로 향하기 위해 합장을 하는 것처럼 일상적인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 한 가지 생각만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48)

키팅은 관상기도과정에 있어서 호흡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는 기도자가 자신의 호흡에 주의하는 것도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49)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기도자가 무념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 부분에서 ‘금강경’(Diamond Suntra)을 언급 하면서 이렇게 무념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환시, 탈혼, 내적 음성, 영적 교감, 심령 선물 등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50) 키팅은 이러한 무념의 상태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미소나 가려움, 통증 혹은 강한 감정들”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마음속에 있는 심리적인 폐기물들이 버려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51) 이러한 키팅의 방법론은 선, 도가 그리고 요가와 같은 동양의 수련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권명수 교수는 “외형적으로 침묵하는 기도의 모습이 동양 전통과 비슷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내용적으로는 추구하는 목적이 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였지만, 관상과 동양 신비종교에서의 명상이 형식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52) 물론 형식이 같다고 내용이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상에 도달하기 위해 꼭 동양의 수련방식을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키팅을 비롯한 현대 관상운동가들이 말하는 관상기도 혹은 향심기도의 방법론들은 성경보다는 동양의 신비종교의 수련방식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관상기도가 동양의 수련방식을 차용한 데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요가나 명상과 같은 동양의 명상운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자, 이러한 관심을 기독교적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53)

예수회 수도자이면서 조지타운대학교 신학부 교수인 토마스 킹(Thomas King)은 “토마스 머튼의 선사상”이라는 글에서 머튼이 다이세쓰 스스끼(Daises Suzuki)가 쓴 선(禪)에 관한 글을 읽고 자신이 말씀을 통해서 가지고자 했던 그러나 결국 이루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합일에 대한 방법들을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54) 머튼은 선사상에서 자신의 심령을 맑게 정화하는 법을 배운다. 선과의 만남은 그로 하여금 동양의 여러 신비사상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여기서 발견한 묵상에 관한 방법들을 수용하여 ‘주부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의 방법론에 적용시켰다. 55)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시아, 선, 이슬람 등 이 모든 것들은 나의 삶 속에 함께 진입해 온다. 이 모든 것을 제외한 채 나 스스로 수도원 생활을 영위하려는 시도는 바보 짓일 것이다.” 56)

관상기도와 동양의 신비사상의 방법론에 있어서의 유사성은 ‘거룩한 단어’라는 방식에도 잘 나타난다. 관상기도에서 거룩한 단어를 묵상하는 것은 마치 박티 요가에서 신과의 합일을 위해 ‘남잡’(Nam-Jab, 신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과 또 초월적 명상에서 ‘만트라’(Mantra)를 반복적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짐 보스트(Jim Borst) 신부는 이슬람의 수피즘(Sufism)을 예로 들면서 “수피즘도 그분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함으로써 거룩한 단어를 묵상하는 것을 정당화 시킨다. 57)

보스트는 관상기도 가운데 이루어지는 호흡법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는데,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 마심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숨을 내쉬면서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을 내어 보낸다고 이야기 한다. 58) 관상기도와 동양의 신비종교와의 유사성은 방법뿐만 아니라 그 목적에 있어서 무아의 경지에서 절대자와 합일을 통한 기쁨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차이가 없다.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힌두교든 불교든 동양 어디서나 낙원의 강에 대해 끊임없이 갈망합니다. 이런 다양한 묵상적 실존의 배후 철학과 신학이 무엇이든 목표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합일의 추구, 즉 내적 자아가 절대자와 연합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59)

머튼을 비롯한 현대 관상기도운동가들이 관상기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동양의 신비사상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동양의 신비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4. 관상기도의 문제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관상기도의 뿌리가 성경이 아닌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사상에 있으며 그 방법에 있어서 동양의 신비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본 논지와 관련하여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관상 혹은 묵상을 통해 신과의 합일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현대관상주의 운동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현대관상기도운동은 특별계시의 필요성을 부인한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이들의 견해는 직관에 의한 신 인식을 일체의 인식의 전제로 삼는 본체론주의(ontologism)의 견해와 흡사하다. 본체론주의란 사람이 직관을 통해서 하나님을 직접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이다. 60) 인간이 직관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견해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 시킨다는데 있다. 현대 관상기도운동가들은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기 때문에 인식을 통해서는 알 수 없고 오직 관상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보는데, 이것은 정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식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론은 결국 이들로 하여금 다른 종교적 전통에 속한 사람들일지라도 진리를 추구하고 신의 은총에 반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하였다.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고등 종교에는 묵상이 평범한 것이자 최소한 정당한 것임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어디에서도 묵상 생활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내적 연합과 절대자와의 직접적인 교감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종종 자연적이거나 초자연적인 모종의 영적 체험도 겪게 됩니다. 초자연적 신비의 체험은 진정으로 진리를 구하고 신의 은혜에 감화 받고 반응하는 선한 양심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태양 아래 어디서나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61)

이러한 머튼의 주장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성경의 진술과도 위배되는 것이다. 칼빈은 죄악된 인간이 추론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데 이를 수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다. “우주의 창조아래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고 바울이 가르치는 바는 사람이 분별하여 알아낼 수 있는 자연계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62) 칼빈은 자연계시는 결코 타락한 피조물들을 살아계시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기에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는 성경이라는 안내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63) 그는 계속해서 “성경이 없이는 우리는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주의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 위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의 계시가 전달 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가르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사람이 자연을 ‘관상함’(바라봄)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분명 하게 지적한다.

둘째로, 현대 관상기도운동의 문제점은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서 지적한 그들의 인식론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플로티누스의 영혼의 사닥다리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영혼이 관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마주보고 그분과 연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가 필요가 없게 된다.

“자연적 묵상이란 계시의 상징과 자연 속에 반영된 하나님의 모습 안에서 또는 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직관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랫동안 금욕함으로써 마음이 온전히 정화된 상태를 전제로 합니다. …이 단계에서 묵상가의 사고는 더 이상 욕망이 없고 더 이상 뒤틀리지 않습니다. 사고는 단순하고 직선적입니다. 그는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봅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64)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머튼은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 하려면 관상기도를 통해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부인되면 자연히 종교다원주의로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비종교에 대한 머튼의 입장에 잘 나타난다.

“동양의 숭고한 종교문학인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는 대학 인문학 강좌에서 플라톤이나 호머에 견줄만한 자격이 있습니다…바가바드 기타는 묵상을 통해 평온함, 초연함,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헌신에 이르는 길을 크리슈나의 말을 빌려 설파한 고대 산스크리트 철학시(詩)입니다…. 이는 성 버나드, 타울러, 페넬롱 등과 같은 많은 서구 신비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순전한 사랑의 교리입니다. 65) 일부 신학자들은 흔히 동양 종교의 영적 체험을 초자연적 차원이 아닌 자연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크 마리탱(Jacque Maritain)과 가리구-라그랑즈(Garrigou-Lagarange) 신부 등은 교회 밖에서도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묵상이 가능하다고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선물들의 주인이시며 진리를 향한 진지한 열망과 진실함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은혜의 선물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66)

머튼이 “나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 모순점을 발견할 수 없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좋은 불교도가 되려고 한다.” 67)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신학적인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현대 관상기도운동은 신관에 있어서 범신론의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관상기도는 부정의 길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에 이르려고 한다. 이들은 그레고리의 전통을 따라 관상을 통해서 알 수 없는 미지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키팅은 관상기도를 통해서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초월하는 궁극적인 신비의 신에게 우리의 온 존재를 열 수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신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많다. 현대 관상기도운동가들이 타 종교에서도 신과의 합일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잘못된 신관에 서있기 때문이다. 키딩이 그의 저서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기보다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신비, 궁극의 존재와 출처로서의 하나님이다.

넷째로, 현대 관상기도운동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부인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관상기도의 사상적 토대는 플로티누스의 유출설과 영혼의 상승과 하강운동에 대한 이론을 단지 기독교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동족관계에 있기에 본성적으로 하나님에게로 회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를 따르자면 인간의 영혼이 창조 전에 이미 일자와 함께 있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무로부터의 창조와 대치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현대 관상기도운동은 동양의 선, 요가, 도가와 같은 수련방식을 차용한다. 머튼과 키팅 모두 동양종교의 묵상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실제로 키팅이 제시한 관상기도의 방법론과 마하리시 파운데이션(Marharish Foundation)에서 제공하는 ‘초월적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에 관한 방법을 보면 키팅이 제시한 향심기도의 방법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68) 관상기도와 초월적 명상은 둘 다 하루에 20분씩 두 번의 묵상을 권장한다. 그리고 둘 다 관상 혹은 묵상의 과정에서 어떤 특정한 단어를 연상하거나 말하라고 한다. 관상기도에서는 그것을 ‘거룩한 단어’라고 하고 초월적 명상에서는 ‘만트라(mantra)’라고 한다. 69) 뿐만 아니라 둘 다 관상과 명상의 단계 가운데 ‘격한 감정’(vibrations)이 70) 일어난다고 본다. 나아가 관상기도와 초월적인 명상은 신체감각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에 잠겨 들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를 누린다고 말한다.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서 관상기도와 초월적인 명상은 무념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끝으로 관상기도와 초월적 명상의 목표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있는 참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관상기도의 방법론은 1960~70년대에 마하리시 마헤스 요기(Maharishi Mahesh Yogi, 1914~2008)에 의해서 미국에 소개된 ‘초월적 명상’의 방법을 가톨릭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5.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관상기도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관상기도가 성경이 아닌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철학에 그 사상적 뿌리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20세기 중반기에 일어난 현대 관상기도운동은 그 방법론에 있어서 동양의 신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밝혔다. 관상기도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들은 관상기도에서 가톨릭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복음적인 관상기도가 가능하지 않느냐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관상기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가톨릭적이어서가 아니라,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철학 그리고 동양의 신비사상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관상기도에 관한 이러한 문제점이 많이 있음에도 꼭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오늘날 한국교회 대부분이 사용하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보자. 우리가 한얼님이나 하느님 혹은 옥황상제라는 단어대신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왜곡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관상기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것이 통성기도 일변도인 한국교회의 기도방식에 다양함을 제시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하지만 기도의 다양성을 위해서 관상기도를 도입하기에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이 가진 신학적인 문제점들이 더 많기에 그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여러 종류의 기도를 언급한 바가 있다. 그는 기도의 종류에는 개인기도, 공중기도, 말로 하는 기도, 노래로 하는 기도 그리고 침묵기도와 같은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71) 관상기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지적과 같이 한국교회에서 침묵기도의 전통이 등한시 되어온 것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그러나 그 대안을 찾기 위해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관상기도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이미 개혁교회 전통 안에 있는 기도의 다양한 전통들을 계승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침묵기도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과정에서 형식화 되거나 소홀히 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리고 침묵기도의 필요성에 대한 요청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침묵이 무엇을 위한 침묵이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칼빈은 올바른 기도는 믿음으로부터 나오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은 성경이 아닌 우리 자신의 내면을 관찰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관상기도의 전통과는 다르다. 그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은혜의 부요함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72)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것을 강조하였다. 73)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배되고 억제되어야 한다. 74)

기도의 방식과 자세에 관한 칼빈의 교훈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고린도후서 1:28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러한 방식으로 더 온전하게 임할 수 있고 또 임해야 한다고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데는 이런저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흔히 범한다.” 75) 물론 칼빈도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것과 모자를 벗는 것과 같은 신체적 자세를 이야기 했지만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시로서 이야기 했지 그러한 자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듣게 한다거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데 유익이 된다고 하지 않았다. 76)

칼빈은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77)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게 된 우리들의 과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칭의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출발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말씀과 성례 그리고 기도를 허락해 주셨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출처가 불분명한 관상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들에게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 미주 >

1) Mirsolve Wolf, “Theology, Meaning and Power: A Conversation with George Lindbeck on Theology and the Nature of Christian Difference”, in The Nature of Confession: Evangelical and Postliberals in Conversation, ed. Timothy R. Phillips and Dennis L. Okholm (Downers Grove, ILL.: IVP, 1996), 45.
2) Unpublished paper., 이동원, “ 관상기도에 대한 나의입장”, 3.
3) 콘템플라티오는 ‘성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템플룸(templum)’에서 유래되었다. 템플룸은 로마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 세속과 구별하여 따로 지정한 공간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제사장들은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서 사물의 내면을 바라보았다.
4) 그리스어 테오리아는 ‘어떤 대상을 목적을 가지고 집중해서 보는 것’을 의미하는 ‘테오레인’에서 나왔다.
5) 이정배, <서양철학사 연구>(서울: 학문사, 1982), 41~45.
6)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하여 영혼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보았던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이야기 한다. 그것은 먼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즉, 우리가 영혼의 본고장인 형상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영혼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미혹되지 않고, 참된 실상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영혼의 상승이다. 영혼 상승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혼이 육체라는 굴레를 벗어나 스스로 영적인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의 첫 단계는 눈을 뜨는 일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거짓 실상으로부터 벗어나 참 실상으로 나가가는 과정이다.

7) 플라톤은 <파이도스>에서 영혼의 선재성을 신화적으로 표현하였다. 플라톤은 흑마 한 마리와 백마 한 마리를 동시에 몰라가는 마부라는 비유를 통해서 영혼을 설명한다. 그는 마부는 이성적 영혼, 백마는 용기의 영혼, 그리고 흑마는 정욕의 영혼으로 비유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마부가 모는 말들은 각각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하늘 높이 날아가 창공의 천장 밖에 있는 초 감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했다. 하지만 백마와 흑마는 서로 상반된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초감각적인 세계를 향해 날아가지 못하게 된다. 천장 밖의 영원한 실재의 세계에서 양분을 공급 받지 못한 말들의 날개의 깃털은 하나씩 둘씩 빠져버렸고, 결국 날수 없게 되었다. 플라톤은 날개를 잃어버린 말이 하늘을 날 수 없게 된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지상으로 떨어졌다고 본다. (참고) 디오기네스알렌,< 신학을이해하기위한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76~77.
8) 프리도릭켄, <고대 그리스철학>(서울:서광사, 2000), 348~371.
9) 디오기네스알렌,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123~133. 플로티누스는 가시적 세계의 다양성과 다수성의 배후에 이를 종합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일자이다. 가시적 세계의 다수성은 일자가 하향적으로 범람한 결과였다.

10) 플로티누스는 인간의 영혼이 일자로부터 유출되어 육체를 입게 된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지만, 육체를 입은 그 상태에서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구로부터 초월한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 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구로부터 초월 하려는 행위가 영혼의 정화이다. (참고) 프리도릭켄, <고대그리스철학>, 348~371.
11) 디오기네스알렌,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133.
12)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I.25. 여행가방(Carpet Bags) 혹은 잡록(Miscellanies)라고 번역되는 Stromata 에는 클레멘트의 영적인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앙을 우리가 필요로하는 모든 것이라고 보았던 터툴리안과 달리, 신앙은 우리가 지식을 세우기 위한 기초라고 보았다. (참고) Tony Lane, A Concise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London: T&T Clark), 18-20. 클레멘트의 Stromata 에 대해서는“http://www.logoslibrary.org/clement/stromata/125.html”를 참고하였다. 위 사이트에서는 클레멘트의 Stromata의 영문 텍스트를 제공한다. 사이트 주소 끝부분에 clement/는 클레멘트를, stromata/는 그의 책을, 그리고 /125는 stromata, 1권 25장을 나타낸다. Urban T. Holmes, A History of Christian Spirituality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81), 25~26.

13)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VI.7. http://www.logoslibrary.org/clement/stromata/607.html
14) Rowan Williams, The Wound of Knowledge (Eugene: Wipf and Stock Publisher, 1998), 34~35.
15) 역자주. 헤브도마드는 플라톤의 <대화록(Timaeus)>에 나오는 물질세계의 세계의 창조자를 말한다.
16) Reinhold Seeberg,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Eugene: Wipf and Stock Publisher, 1997), 135.
17) 앤드루 라우스, <서양신비사상의 기원>(서울: 분도출판사, 2001), 99~101.
18) Tony Lane, A Concise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21.
19) 앤드루라우스, <서양신비사상의 기원>, 107.
20) Anthony Meredith, Gregory of Nyssa (London: Routledge, 1999), 105.
21) 앤드루 라우스, <서양신비사상의 기원>, 130~133. 그레고리는 아가서 주해에서 “신부는 거룩한 밤으로 둘러싸여 있다. 신랑은 이 거룩한 밤에 찾아오지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분이 어떻게 밤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이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본성의 모습을 감추고 계시며 손에 확실하게 잡히지는 않으면서도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께서 현존하여 계시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신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레고리의 아가서 주해는 앤드루 라우스 <서양신비사상의 기원>, 146에서 재인용.

22)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프락티코스: 수도생활에 대한 가르침>(서울: 분도출판사, 2011), 77~90.
23) 위(僞)-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또는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라고 알려진 이 신비신학자는 A.D. 500년경 시리아에 살았던 신분이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다.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는 사도행전 17:34에 나오는 사람으로 바울과 논쟁을 벌였던 인물인데, 6세기에 이 사람의 이름으로 된 글과 편지들이 나왔기 때문에 그를 위-디오니시우스라고 부른다.
24) 위디오니시우스, <위디오니시우스전집>(서울: 은성, 2007), 210.
25) “부정신학에서 ‘부정’은 ‘부정’, ‘부인’ 또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Apophasis는 부정에 의한 논증 내지는 논리적 추론 방법을 의미한다. 이 부정이란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이 아닌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방식이다. 신학에 있어서 부정의 길이란 하나님에 대한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규정을 ‘부정하는 방식(via negativa)’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시도를 말한다. 위-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부정”은“긍정”의 반대가 아닌, 궁극의 원인인 하나님은“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참고) J. Meyendorff, Byzantine Theology, historical trends? doctrinal theme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83), 11-12. 전광식, “Theologia Negativa: 부정신학의 역사와 의미”, <석당논총>45(2009/11), 동아대학교, 33~66.
26) 위-디오니시우스, <위디오니시우스전집>, 238.
27) 위-디오니시우스, <위디오니시우스전집>, 212.

28) 중세후기의 신비신학을 이해는 데는 다음과 같은 책들이 도움을 준다. Rowan Williams, The Wound of Knowledge (Eugene: Wipf and Stock Publisher, 1998), 1-193.; Ray C. Petr, Late Medieval Mysticism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57), 1-424. 성공회신학자인 Rowan Williams는 신약성경이 쓰여진 이후부터 루터(Luther)와‘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에 이르기까지 서구 신비주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Ray C. Petr가 편집한 Late Medieval Mysticism은 중세 후기 신비주의사상가들의 글들을 잘 소개하고 있다.
29) 이은선 박사는 “세속화 시대의 기독교 영성”에서 중세후기에 와서 신비주의적 관상기도가 사라지게 된 요인을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에게서 찾는다. 그에 의하면 로욜라가 신비주의적인 수도자적 영성인 관상 대신에 사도적 영성인 활동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이 중세후기에 관상기도에 대한 관심이 약화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 이은선,“ 세속화시대의기독교영성”,< 성경과신학>제 49권 (2009), 82.
30) 토마스 머튼, <묵상의능력>(서울: 두란노, 2006), 269.
31) 토마스 머튼, <묵상의능력>, 147.
32) 토마스 머튼, <새명상의씨>(서울: 분도출판사, 2009), 15.
33)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일 본질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34) 토마스 머튼, <묵상의능력>, 246.
35) 토마스 머튼, <묵상의능력>, 122.
36) John Calvin, Institutes, ed. J.T. McNeill and F.L. Battles(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III.13.11. 이하 Institutes라고 한다.

37) 토마스 머튼, <묵상의능력>, 74.
38) 토마스 머튼, <묵상의능력>, 81~83.
39) 토마스 머튼, <묵상의능력>, 108.
40) 토마스 머튼, <묵상의능력>, 102~105. 머튼은 수동적인 묵상을 위해서 거쳐야 할 단계의 예로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 성 존 루이스브룩(John Ruysbroeck) 그리고 무지의 구름을 예로 든다. 그는 성 요한은 모든 욕심에서 초연해지려고 노력할 것을, 성 존 루이스브룩은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빛을 바라 볼 것을, 그리고 <무지의 구름>은 우리가 그 무지 혹은 망각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이러한 머튼의 주장은 플라톤주의의 영혼의 상승운동을 기독교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41) 엄무광은 토마스 키팅의 주도아래 바실 패닝턴과 윌리엄 매닝거 두 신부가 영적으로 목말라 하는 현대인들을 위하여 중세 신비주의 전통에 있는 관상기도를 현대화 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참고) 엄무광, <관상기도의 이해와 실체>(서울: 성바오로출판사, 2002), 92~93.
42) 관상기도와 플라톤주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지적하였기에 이 장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43) 토마스 키팅,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관상기도 입문서>(서울: 가톨릭출판사, 2011), 28. 이하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라 한다.
44) 토마스 키팅,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201.
45) 토마스 키팅의 책을 번역한 엄무광은centering prayer를 향심기도라 번역하였다. 번역가에 따라서 centering prayer는 중심기도, 구심기도 그리고 향심기도로 번역되었는데 본고에서는 향심기도와 관상기도 둘 다 관상기도라고 할 것이다.
46) 토마스 키팅,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28~29, 147.
47) 키팅의 향심기도 수련법을 소개한 권명수 교수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몸 자세는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기에,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기도 자세가 요구된다. 몸에 관하여 동서양의 모든 기도 수련에서 공통되게 추진하는 일관적인 원리는 등을 똑바로 세우지만 긴장하지 않는 것이다. 무릎을 꿇거나 기도의 자세를 사용하면, 몸이 혈액 순환이나 호흡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의식을 적절하게 집중하고 깨어있는 상태로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허리의 자세로서 척추를 곧게 세우면 내장의 압박이 그만큼 줄고 복압력이 생겨 호흡이 편해지고 정신도 안정된다. 뿐만 아니라 온몸의 긴장이 사라지며 마음이 집중된다.” 권명수, “관상기도의 성서적 이해와 실천”, <활천> vol.644(2007), 37.
48) 토마스 키팅,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38~39, 165~175. 그는 한 가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거룩한 단어’를 마음속으로 한두 번 부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49) 토마스 키팅,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57, 88, 90~91. 키팅은 사람의 생각과 호흡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50) 토마스 키팅,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100.
51) 토마스 키팅,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139~140. 여기서 말하는 강한 감정이란 웃음과 눈물, 두려움과 불안 혹은 노여움과 같은 감정들이라고 키팅은 말한다.
52) 권명수, “관상기도의 성서적 이해와 실천”, 33.
53) 동양의 신비종교에 대한 관심은 머튼에게도 나타난다. “박티 요가(bhakti yoga)의 신비주의는 가장 인격적이고 인간적인 형태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입니다.”(참고) 토마스 머튼, <묵상의 능력>, 264.
54) 토마스 킹, “토마스 머튼의 선사상”, <신학전망> 78 (1987, 가을), 159.
5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초기 현대관상기도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머튼이 속했던 트라피스트(Trappist) 수도회 회원이었다는 것이다. 토마스 키딩이나 윌리엄 매닝거 역시 이 수도회 소속이었다. 키딩이 제안한 관상기도의 방법론들은 머튼의 선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키팅 역시 머튼의 전통을 따라 동양신비 사상에서의 명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기독교적으로 적용시켰다.

56) Rob Baker and Gray Henry, Merton and Sufism (Louisville, K.Y: Fons Vitae, 1999), 41.
57) 짐 보스트, <관상(A Method of Contemplative Prayer)>(서울: 성바오로 출판사, 1999), 16.
58) 짐 보스트, <관상(A Method of Contemplative Prayer)>, 21. 이러한 호흡법은 한국관상기도 운동가들에게‘들 숨’과‘날 숨’으로 전달 된다.
59) 토마스머튼, <묵상의능력>, 263.
60) Ontology는 ontos(being, 존재) + logos(study)의 합성어로 본체론으로 번역이 된다. 이 견해는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으며, 1861년 교황 피우스 IX세에 의해서 정죄된 바 있다.
61) 토마스머튼, <묵상의능력>, 162.
62) John Calvin, Institutes, ed. J.T. Mc Neill and F.L.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I.5.14. 이하 Institutes 라고 한다.
63) John Calvin, Institutes, I,6.1.
64) 토마스머튼, <묵상의능력>, 78.
65) 토마스머튼, <묵상의능력>, 265.
66) 토마스머튼, <묵상의능력>,267~268.
67) David Steindl-Rast, “Recollection of Thomas Merton’s Last Days in the West,”Monastic Studies, 7:10, 1969. 다음의 사이트에서 재인용함. http://www.gratefulness.org/readings/dsr_merton_recol2.htm

68)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사이트들을 참고하라. http://www.tm.org http://en.wikipedia.org/ wiki/Transcendental_Meditation_technique; 키팅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본 논문 p.14~15를 참고하라.
69) 거룩한 단어의 사용법에 있어서 관상기도와 동양의 신비종교와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본 논문 p.14를 참고하라.
70) 토마스 키팅의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를 번역한 엄무광은 ‘vibrations’를 ‘격한 감정’이라고 번역하였다.
71) John Calvin, Institutes, III.20.28~33.
72) John Calvin, Institutes, III.20.2.
73) Commentaries on John Calvin, Psalm 86:5.
74) Commentaries on John Calvin, Psalm 35:23.
75) John Calvin, Commentaries on John Calvin (Grand Rapids, M.I: Eerdmans, 1973), 2 Corinthians 12.28. 이하 Commentaries on John Calvin 이라고 한다.
76) John Calvin, Institutes, III.20.33.
77) John Calvin, Institutes, III.20.2.
교회와신앙의 다른기사 보기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10)바르트..음악가 아내를 두
이단 박윤식 교재 사용 '구속사
이광선이 삼킨 콩고자유대 총회소속
김기동 씨, 목회비 60억 횡령혐
만민중앙교회 ‘포스트 이재록’ 누
장신대, 동성애 문제 관련 입장
분석/나실인성경원 노성태 씨의 비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한국교회문화사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제호 : 교회와신앙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3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