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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자본주의 배우기 열풍
정권 수립 55주년 행사 계기 두드러져
2003년 10월 01일 (수) 00:00:00 이영종 yjlee@joongang.co.kr

평화자동차 관계자는 “휘파람을 선전하는 대형 입간판 5개가 조만간 평양시내 주요 도로에 설치될 예정이다”면서 “이 광고판은 가로 9m, 세로 3.5m 크기”라고 밝혔다. 그는 “승용차 휘파람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는 북한당국은 일단 내수 시장을 겨냥해 이 광고판을 설치하기로 했다”면서 “광고는 평양지역에 한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배기량 1천580cc의 휘파람은 이탈리아 피아트의 ‘씨에나’를 모델로 하고 있으며 지난해 7월 북한에서 시판되기 시작됐다. 대당 1만4천 달러로 북한의 일반주민들이 구입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통일교측의 제품 광고라는 점에 대한 평가 및 대응이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외국인 투자지역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돼온 상업성 광고가 평양시내에까지 등장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받아 들여 진다. 북한 전문가들은 이를 지난해 북한당국이 시행에 들어간 7·1경제관리 개선 조치 이후 나타나고 있는 북한 사회변화의 대표적 변화상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북한은 대북 투자에 나선 외국기업의 상업광고를 법적으로 규제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밝혀왔지만 실제 이를 평양 등 투구외부에 본격적으로 시행하려는 움직임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91년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지정된 나진·선봉에서 외국기업들이 상업용 입간판과 공보수단을 통해 광고를 할 수 있도록 96년 4월 시행령을 마련했다. 또 지난해 채택된 개성공업지구법 제19조도 개발업자는 광고업 같은 영업활동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해 경제 개혁시책으로 평가된 7.1경제관리 개선 조치가 시행되면서 북한의 공장과 기업소는 자체 노력에 의해 벌어들인 수익금을 독자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하는 등 책임경영제로 전환됐으며 상업광고 등장도 제품을 더 팔아 이익을 남기려는 실리주의 경영전략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광고간판의 등장보다 놀라운 것은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증면과 함께 광고게재를 추진중 이라는 사실이다. 정부 관계자는 “노동신문이 조만간 기존 6면에서 12면으로 지면을 늘리는 한편 자본주의 사회의 신문처럼 5단 광고 게재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런 움직임을 “보다 많은 제품을 판매하려는 실리주의적 사고와 함께 북한 경제가 시장지향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려 대외 환경을 우호적으로 바꿔보려는 의도”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런 북한의 움직임은 지난 9월 9일 평양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북한정권 수립 55주년 행사를 계기로 두드러졌다. 북한이 이 행사를 사실상 김정일 정권의 제2기 집권시점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지난 94년 7월 김일성의 사망으로 휘청이던 북한 정권이 극심한 식량난과 북핵문제를 둘러싼 체제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숨고르기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얘기다. 북한이 막연한 구호로서 내세운 ‘강성대국 건설’같은 수준을 넘어 보다 구체적인 체제 내실 다지기에 팔을 걷어 부쳤다는 관측도 나온다. 7.1경제관리 개선조치와 함께 개성공단 건설과 금강산 관광의 지속적인 추진, 신의주 행정특구 조성계획 같은 잇단 개혁·개방조치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은 특히 정권 수립 55주기를 맞아 내놓은 체제개편에서 경제관료를 대거 교체하는 등 개혁·개방과 실리 챙기기의 틀을 잡았다. 이번에 새로 기용된 박봉주 총리, 김광린 국가계획위원장, 박남기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장 등 세 사람은 지난해 10월 남한을 방문했던 경제시찰단의 일원이다. 당시 8박9일 일정으로 방한했던 시찰단은 롯데월드·에버랜드·포항제철·현대자동차·부산컨테이너 항만 등 국내 산업시설을 둘러봤으며 화학공업·농업·경공업·IT산업·도시건설 등에서 남한의 경험에 큰 관심을 보였었다. 특히 당시 화학공업상이었던 박봉주 신임 내각총리는 “볼 것은 많은데 눈이 두 개밖에 없어 바쁘다”며 자본주의 경제 시찰에 열의를 보였는가 하면 거리낌없는 질문공세와 꼼꼼한 메모로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또 박남기 신임 예산위원장은 20여 년간 국가계획위원장을 역임했다는 점에서 향후 북한 경제에 효율적인 예산 지원이 이뤄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남한 경제의 실상을 돌아보도록 지시하고, 남한방문에서 적지않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그들을 낙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층부의 움직임과 함께 경제 일선에서도 실무관료나 대외무역 관계자들에 대한 자본주의 마인드 확산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북한의 한 경제 전문지 최근호는 무역종사들에게 혁명적인 사고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와 생태, 세계자본주의 시장의 구조적 모순 등을 전면적으로 연구 분석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대외무역 관계자들은 또 수시로 변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경기변동과 결제화폐의 시세변동, 상품의 수요와 공급, 거래회사의 조직체계와 경영환경 등을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사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지난해 5월 북한이 치른 아리랑 축전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방북했던 필자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던 내용이다. 평양에는 당시부터 달러벌이를 위한 각 기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등 자본주의 체제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필자가 투숙한 보통강호텔의 2등실 요금은 하루 165달러(약 21만원). 외국 관광객을 주로 유치한 고려호텔은 이보다 약간 높은 수준으로, 시설이나 북한의 물가수준에 비해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평양에서 35㎞ 떨어진 단군릉은 입장료만 20달러였고, 단군 유골을 직접 보려면 100달러를 별도로 내야 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또 행사가 열린 5·1경기장 앞에는 무역회사별로 판매대가 등장해 직원들이 서로 호객행위에 열심이었다. 심지어 주체사상탑 아래에서도 달러를 받고 오렌지주스 등을 파는 간이매점이 자리해 있었다.

북한이 7·1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실리사회주의’란 용어는 이런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있다. 북한은 실리사회주의를 “사회주의 원칙을 지키면서 현대적 기술로 장비된 실질적으로 인민이 덕을 보는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개인적인 실리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와는 다르게 집단의 이익(실리)을 원칙으로 생산활동을 추구하는 것이란 해석이다.

물론 북한의 이런 노력이 온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련의 개혁조치들이 근본적인 변화라기보다는 고립화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파산위기에 처한 체제를 유지하려는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란 얘기다. 또 붕괴 직전의 북한 경제가 이런 제한적인 자본주의 학습만으로는 회생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비관적 시각도 있다.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수익성 있는 생산활동이 이뤄지기 어렵고 결국 국제사회의 경제체제에 편입되지 못한 채 무너져 갈 것이란 지적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의 경제개혁이 성공하려면 일본의 금융 원조, 다국적 기채(起債)를 위한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지만 핵위기 교착상태가 해소되지 않는 한 이 같은 지원을 이끌어내기는 힘들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북한이 다른 한켠으로 주민들에게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의 사상학습을 강화하고 있는 점은 좋은 사례다. 북한은   <중앙방송>과 <노동신문> 같은 관영 매체들을 총동원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모기장을 튼튼히 치고 밖으로부터 썩어빠진 부르주아 사상과 생활방식이 절대로 침습하지 못하도록 인민을 영도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만일 돈이나 강제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방법을 적용하면 사람들의 혁명적 열의를 발양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제도 자체를 변질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주장했다. 평양에 불고 있는 자본주의의 거센 바람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북한 체제에 새로운 생존의 길을 제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사회주의의 모순을 일시적으로 덮어버릴 눈가림에 불과할지 주목된다. /이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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