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끈한 스포츠로 미화…짜릿한 대리 만족

‘태권도 선수와 권투 선수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유도 선수와 레슬링 선수가 경기를 하면 누가 유리할까?’

최근 들어 진정한 강자를 가린다는 ‘이종(異種)격투기’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급격하게 보급되고 있는 이종격투기는 인간의 파괴욕망과 동물적인 정복욕을 자극하며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이종격투기는 관객들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자극시키고, 관객 자신이 행동하고 싶었던 폭력행위의 욕구를 선수들을 통해 대리 만족시켜주고 있다.

이종격투기는 여러 무술과 격투기가 최소한의 룰만을 가지고 상대가 기권하거나 KO될 때까지 겨루는 경기이다. 여러 격투기들의 기술을 모두 포함해야 하기에 룰은 자연스럽게 최소화 됐다.

현재 이종격투기의 룰은 물기, 꼬집기, 눈 찌르기, 박치기, 급소 공격, 뒤통수와 척추에의 직접 타격 등을 제외하고는 어떤 공격이든 허용하고 있어 스포츠라고 할 수 없는 정도이다. 차라리 막싸움에 가까운 이종격투기는 소위 ‘끝을 볼 때까지’ 겨루기 때문에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당연지사. 얼굴이 찢어지거나 코피가 나는 것은 기본이고, 발차기 한번에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손가락이나 팔이 탈골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최근 갑자기 많아진 국내 이종격투기 대회에서는 이종격투기에 익숙하지 않아 방어기술이 미숙한 아마추어 선수들의 대거 출전과 숙달되지 않은 심판들의 진행으로 인해 수많은 부상자를 속출해내기도 했다. 따라서 항상 이종격투기 경기장은 이른바 ‘피범벅’이 되고, 관객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의 공격으로 인해 상대선수가 흘리는 피를 보고 열광한다.

‘싸움 카페’ 수백개… ‘맞짱 문화’ 조장
 이렇게 이종격투기가 인기를 얻게 된 원인에는 대중매체의 영향이 크다.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은 앞다투어 외국의 이종격투기를 중계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이종격투기 대회가 올 4월에 치러진 후에는 신문·방송할 것 없이 이종격투기를 히트상품화 시켰다. 은퇴한 권투나 유도 선수들의 이종격투기 도전기를 휴먼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도했고, 스포츠신문들은 외국의 유명선수들의 신상과 최근 근황을 상세히 소개해 새로운 스포츠 스타로 만들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이종격투기를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고 막싸움으로 보는 가운데서도 이종격투기를 선호하는 이들은 이것을 엄연한 스포츠라고 주장한다. 이종격투기 전문 해설가인 H씨는 “이종격투기의 매력은 정직함”이라며 “오로지 실력으로만 상대를 눌러야 하는 이런 깨끗한 승부는 사회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것”이라고 이종격투기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인터넷을 매개체로 한 이종격투기 동호회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인터넷포탈사이트 ‘다음’에만 이종격투기 관련 카페가 200개 이상이 개설돼 운영중이고, 회원수가 1만 명이 넘는 동호회도 여러 개 있을 정도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종격투기의 대중화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이른바 ‘맞짱’ 문화가 정착하는 데 크게 한몫을 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일대일, 혹은 패거리들끼리 싸움을 하는 ‘맞짱’은 이유 없이 누가 센지를 겨루어 보는 이종격투기의 청소년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종격투기의 보급으로 인해 조직폭력배 사회나 학교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던 맞짱은 이제 청소년들 사이에서 당당한 스포츠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학교에서나 동네 구석에서 이종격투기의 규칙대로 맞짱을 겨루는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지경이다.

‘맞짱’이 보급되면서 인터넷 상에는 ‘싸움’ 카페가 생겨났다. 이미 몇백 개에 이른다. 싸움카페에서는 자신에게 도전할 사람을 구하는가 하면, 싸우기 전의 각오와 싸운 후의 경험담 등을 올려 회원들끼리 공유하고 있다. 회원들은 각자 싸움을 잘하는 법을 전수해주기도 한다.
‘마루오카’라는 아이디의 학생은 결전을 앞두고 여러 회원들의 조언을 구했다.

“우리 반에 마음에 안 드는 애가 있는데, 그놈을 밟아버리고 싶은데 어떡하죠? 싸움할 때 좋은 방법 좀 가르쳐주세요. 아, 그리고 제 주특기는 박치기입니다.” 

회원들은 비교적 친절하고 상세하게 싸움에서 필승하는 법을 알려 준다.

“진정한 싸움은 상대의 움직임에 유의해야 합니다. 너무 얼굴을 커버하면 상대가 보이지 않아 더 많이 타격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릎관절 뒷쪽을 정강이로 가격하면 무너집니다. 그때 박치기를….”

“일단 무릎으로 대가리 잡고 찍으세요. 그러면 맞은 놈은 순간 아찔해요. 그 순간 박치기를… 가격하세요.”

 잔혹·비인간적인 행위 약육강식 부추겨
스포츠라고 하기엔 너무나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요소를 가진 이종격투기에 관해 교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C.C.C 스포츠선교부 홍상일 대표간사는 “극단적인 리얼리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종격투기에 매료된다”며 “잘못되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이종격투기를 다른 엄격한 룰이 있는 격투기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하며 이종격투기를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의 스포츠라고 분석했다.

스포츠 칼럼니스트 고두현 씨는 “구경거리 제공에 치중하는 이종격투기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이 같은 경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잔인한 자극을 원하게 만드는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또 고두현 씨는 경기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배우고, 인격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페어플레이의 기본정신인 것을 강조하면서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이종격투기에서는 페어플레이 정신을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잔인한 장면으로 인해 청소년 정서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이종격투기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이종격투기란? 70년대 중반 안토니오 이노끼와 무하마드 알리의 대결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를 이종격투기의 시초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종격투기의 본격적인 출현은 93년도 ‘UFC(Ultimate Tighting Championship)’의 탄생으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UFC’ 이후 일본의 ‘K-1’과 ‘프라이드FC (Fighting Championship)’가 생겨나면서 이종격투기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올 4월에 국내 최초로 ‘스피릿MC(spirit martial challenge)’ 대회가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됐는데, 6천여 명의 관중이 몰려 이종격투기의 인기를 확인시켜줬다. 이종격투기의 유행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바로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이다. KBS스카이는 작년부터 일본과 미국에서 열리는 ‘K-1’, ‘프라이드FC’, ‘킹오브더케이지(King Of The Cage)’ 등 세 개의 격투기 시합을 방송하고 있다. 이중 ‘K-1’은 국내 위성방송 시청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KBS스카이는 일본의 ‘판크라스(Pancrase)’를, SBS스포츠채널은 유럽의 ‘AFC(Absolute Fighting Champion)’와 ‘CFC(Cage Fighting Champi-onship)’를 최근 중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새롭게 중계되는 ‘AFC’와 ‘CFC’는 전 세계 이종격투기 경기 중 가장 잔인한 경기로 평가받고 있는데, 급소가격, 박치기를 허용하는 등 무규칙에 가까운 룰을 적용한다. ‘CFC’는 ‘AFC’ 우승자 및 각종 격투기 고수들이 모여 다시 최강을 가리는 왕중왕 결정전으로 어떠한 룰이나 보호장치도 없이 8각형 링 안에서 사투를 벌이는 경기로 더욱더 자극적인 화면을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