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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 사상의 신학적 뿌리
2000년 05월 01일 (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신동식 기독교 사역 동역회 실행위원, 삼양교회 목사

  
Ⅰ. 프란시스 쉐퍼의 서론적 고찰

2000년대를 시작하면서 20세기의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렀던 사상가요 전도자였던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을 정리하고 그의 기여와 한계를 논의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인본주의 사상과 혼합주의의 도전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20세기의 교회를 깨웠으며 영적 방황에 휩싸여 헤매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삶의 기준을 세워주면 일상의 삶속에서 참된 진리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인도하였던 20세기의 선지자였다. 제임스 페커의 말대로 쉐퍼는 다른 이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행한 20세기의 독창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쉐퍼를 향하여 패커는 조금도 서스럼없이 평가한다.

"쉐퍼는 영원한 복음을 20세기 현대인들에게 전파하려고 노심초사했던 하나님의 민감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민감한 사람이었던 쉐퍼는 개혁주의 전통에 서있는 장로교 목사였다. 그가 개혁주의 장로교 목사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는 20세기 후반을 매우 힘없이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의 현상은 매우 침울하였다. 젊은이들은 소망을 잃은채 허무주의 속에 빠져 있었으며 섹스와 마약이 대학가를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교회를 찾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교회는 이들에게 삶의 좌표를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은 한사람을 세웠고. 그를 통하여 시대의 아픔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다운 삶의 좌표를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바로 프란시스 쉐펴였고 그의 외침은 교파를 초월하여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만들은 스위스의 "라브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안식처의 역할을 하였다. 지적으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라브리"는 참다운 영적 오두막이었다. 쉐퍼는 개혁주의 사상에 바로 서서 복음주의에 속한 이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는 것에도 분명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쉐퍼의 사상은 단순하게 서구에만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80년 후반 혼란 시기였던 한국 사회에 그의 사상의 접목은 한국 교회와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었다. 엄청난 변화의 현실 가운데 쉐퍼의 책과 그의 사상은 기독 청년들의 사고속에 자리 잡히기 시작하였다. 이제 쉐퍼를 이해하는 것은 이 시대를 이해하는 필수코스가 되었다. 특별히 문화와 시민 불복종운동에 대하여 소경과 같이 가리워졌던 한국교회에 쉐퍼의 영향은 어두운 눈을 뜨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별히 기독 젊은이들의 사상의 전환에 쉐퍼가 차지하고 있는 영향은 참으로 지대한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영향을 준 쉐퍼는 한번도 우리 나라에 온 적은 없다. 그 이유는 우리 나라에 세계관 운동과 동시에 문화에 대한 관심이 성숙되기 이전인 1984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 좀더 살았더라면 한국에서도 쉐퍼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의 육성은 들을 수 없었으나 그의 책들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만났고 닫혔던 지성의 눈을 뜨게 하였다. 그리고 무너져가는 터를 세우기 위한 운동들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문화 운동에 있어서 쉐퍼의 영향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밀려오는 문화의 현상 가운데 기독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세속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다양한 혼돈가운데 쉐퍼는 정직한 질문을 통하여 정직한 답변을 주었다. 아무도 그러한 답을 주지 못했던 시기에 쉐퍼는 답변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쉐퍼의 책들은 갈증을 해소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해소가 자칫 오해를 가져 왔다. 많은 교회에서 쉐퍼의 사상을 가지고 소그룹을 인도할 때 매우 이상한 눈으로 보거나 문제있는 집단으로 본것이다. 그것은 쉐퍼가 가지고 있는 아주 레디칼[Redical]한 모습 때문이었다. 더구나 문화에 대하여 적대적 입장에 서있었던 기존 교회들은 이러한 쉐퍼의 사상을 접목하는데 매우 어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근본주의자다. 한쪽에서는 급진주의자다 하는 소리가 난무하였다. 이것은 쉐퍼의 신학적 배경을 이해하지도 않은 체 그의 사상만 조옮김하다보니 다양한 곳에서 삐그덧 거리는 소리가 들리게 된 이유이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사상의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그의 신학적 배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마 한국적인 독특한 모습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쉐퍼의 신학적 배경을 아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이미 밝혔듯이 그는 개혁주의 장로교 목사이다. 이 사실이 좀더 분명하게 밝혀졌다면 쉐퍼의 교회적 접근은 좀더 쉬웠으리라 생각한다. 이 논문은 바로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연구한 것이다. 그의 신학적 배경을 이해하므로 쉐퍼 사상이 오해 없이 교회에 접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위하여 우선 쉐퍼의 사상적 흐름을 연대기적으로 간략하게 살펴 볼 것이고, 그의 신학적 사상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신학적 배경을 성경관, 교회관, 문화관, 사회관으로 살펴봄으로서 쉐퍼의 신학적 뿌리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러한 이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Ⅱ. 프란시스 쉐퍼의 삶을 통한 사상적 흐름

프란시스 쉐퍼의 삶의 여정 속에 들어난 그의 사상적 흐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그가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왔는지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자세한 그의 생애를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그의 사상에 특별하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을 중심으로 삶의 연대기적 변화를 살펴보려고 한다.

1] 그의 어린 시절

1912년에 태어난 쉐퍼는 여타의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불신 가정에서 태어 났다.  현대적 포스트 모더니즘의 창을 열었다고 한 니체가 2대에 걸친 목사집안에 태어났으나 철저한 무신론자로서 생을 마친것과 매우 비교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쉐퍼의 부모는 자신들의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에 아이를 하나만 낳기로 하였다. 쉐퍼는 외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쉐퍼4세라고 지었다. 쉐퍼의 부모는 쉐퍼가 공학과 디자인 계통의 공부를 하여 편한히 살기를 원했다. 쉐퍼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부하고 일하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성적은 올A였다.

그는 17살 때 기독교인이 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의 회심은 단순한 종교적 열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지적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쉐퍼는 소련에서 이민온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교재로 구입하여 읽던 [그리스 철학 입문서]를 읽다가 그들의 진리에 대한 기록에 매력을 같게 되었고 이러한 진리에 대한 자극은 그를 교회에로 인도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유주의 교회에서 설교를 유심히 들었다. 쉐퍼는 거기서 그 목사의 말은 자유주의적 사회윤리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정직해지려는 열망 속에서 그는 자신의 불 신앙적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복음주의 교회에 나왔으며 그는 6주 동안에 성경을 통독하고 나서 그는 기독교인으로 회심하였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에게 경종을 울렸던 것은 창세기 였다. 내가 들어 보았던 어떤 종교의 가르침에서도, 철학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참된 해답을 창세기에서 찾았다."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가 진리였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회심 사건의 중심은 바로 성경이었다.

2] 평생동역자와의 만남

1932년6월26일 제일장로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일신론자와의 토론이 있었다. 이때에 일신론자가 자신이 어떻게 무신론자가 되었는가의 입장에 대하여 에디스라는 한 젊은 여학생이 일어나 일신론자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논박하였고 이어서 쉐퍼가 일어나서 에디스와 같은 입장에서 일신론자를 논박하였다. 에디스와 쉐퍼는 이때 만남을 통하여 지적인 문제에 관하여 깊은 토론을 하였고 쉐퍼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 매일 편지를 나누었다. 에디스의 권유로 그레셤 메이쳔의 [기독교와 자유]를 읽고 나누었다. 이러한 지적 전쟁터에서의 만남은 라브리 사역을 위한 평생동역자로서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떨어져 있을때도 성경적이며 영적인 공감대를 갖기 위해서 날마다 [매일의 빛]을 읽었다. 그리고 드디어 1935년7월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바로 쉐퍼가 메이쳔 교수가 있는 "웨스터 민스터"신학교에 입학한 후였다.

중국 선교사였던 아버지를 두었던 예디스와의 만남은 그의 사역에 중대한 영향을 가져온다. 사실 쉐퍼의 사역은 예디스가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의 결혼 생활은 그야 말로 가정의 아름다운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1935년7월6일에 결혼하여 48년10개월1주일이 된 1984년5월15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그들의 사역을 뒷바침 해주었다. 많은 이들이 가정 생활에 실패함으로 그들의 사역이 반감되는 것과는 다르게 이들의 만남과 사역은 많은 사역자들에게 좋은 본보기이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많은 도전을 준다. 예디스의 아름다운 고백이다.

"당신의 추억 박물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좋은 추억 그리고 생각하기 싫은 괴로운 추억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추억들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죄가 번성하고 타락한 이 세상에서 삶이 어떤 것인지 더 구체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것입니다. 또한 '지진'으로 무너진 집을 다시 짓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원점으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가치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3]그의 학창시절

쉐퍼는 1931년에 버지니아 햄든 시드니대학에 들어갔고 1935년에 학급에서2등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예디스의 영향으로 프린스턴 신학교에 갈라져 나온 "웨스터 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한다. 쉐퍼와 에디스는 성경이 주는 진리, 완전한 기준이 되는 객관적 진리를 믿는 메이쳔의 신학을 따라 갔던 것이다 .쉐퍼는 메이쳔 외에 탁월한 학자인 코넬리우스 반틸 문하에서도 연구하였다. 쉐퍼의 이러한 신학적 훈련은 그로 하여금 개혁주의 장로교인으로서 평생을 살도록 한 중요한 만남 들이었다.

그러나 신학교2학년 때 메이쳔 박사의 사망 후에 새 장로교회에 또 다른 시험이 왔던 것이다. 결국 쉐퍼는 맥크래 박사와 그 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델라웨어 윌밍튼의 페이스 신학교를 건립을 도우려고 학교를 떠났다. 쉐퍼는 가을 학기 수업부터 훼이스 신학교에서 수업하였다. 그리고 쉐퍼는 이 훼이스 신학교에서 모든 과정에 평균 A를 받고 처음등록 학생이자 최초로 졸업한 졸업생이 되었다.

쉐퍼의 신학 수업은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이 나오고 성경관에 대한 논쟁의 흐름속에서 철저하게 성경을 믿고 있는 웨스터민스터와 훼이스의 신학생활은 그의 사역의 매우 중요한 주춧돌이 되었다.

4]라브리 사역 초기의 영적 갈등과 회복

유럽 순방을 통하여 새로운 사역에로의 부르심을 받은 쉐퍼는 그의 새로운 사역 초기에 심각한 영적 위기를 느낀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었다. 쉐퍼의 이러한 영적 갈등은 쉐퍼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심각하였다.

" 1951년과1952년에 나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영적인 위기에 봉착했었다. 내가 불가지론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이미 여러해 전이었다. 그 후 나는 미국에서 10년을 목사로 봉직했으며, 도 그후에는 나의 아내 에디스와 수년간 유럽에서 봉사해 왔다. 이 때에 나는 역사적 기독교의 위치와 가시적 교회의 순결성을 변호하고 나서야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점차로 나에게 문제가 닥쳐왔다. 그것은 실제에 대한 문제였다. 이것은 양면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내가 보기에, 정통주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노라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성경이 그토록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사건들 속에 있어야 할 사실상의 핵심적인 실재를 별로 찾아 볼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내 자신의 실재도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초창기보다도 더 약화되어 있는 모습으로 점점 나타나더라는 점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내 자신의 전반적인 위치를 재고해 보아야 하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 내외는 그 때 참페리에 살고 있었다. 나는 내 아내 에디스에게 솔직히 내가 다시 온전해 과거로 되돌아가서 불가지론에 이르러 문제 전반을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하겠노라고 말했다. 이 때야말로 나의 아내에게도 진정 어려운 때였을 것으로 본다. 그 당시 내 아내는 나를 위해 무척 기도도 많이 했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불가지론자의 자리로 돌아간 그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영적인 나눔 가운데 새로운 그릇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쉐퍼의 영적인 갈등과 회복의 현장에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인 흐름을 알 수 가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를 재고하는 가운데서 나는 또 다시 발견한 사실이 있으니, 무한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영존 하시는 기독교야말로 참되다는 것을 알만한 전적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좀더 나아가서 내 생애 가운데 심오한 차이점을 일으키는 기타 어떤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재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나는 다음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받은 교훈이 많이 있지만, 우리들의 현재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의 의미에 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많이 들어보지 아니 했다는 것이 문제점이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 것이었다. 점점 태양은 밝히 떠오르고 노래가 흘러 나왔다."

쉐퍼의 삶은 자연스럽게 그의 사역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지를 명백하게 보여주게 되었다. 그는 개혁주의자로 그리고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자로 그의 삶이 방향지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신학적 이해를 통하여 좀더 분명하게 들어 날 것이다.

Ⅲ. 프란시스 쉐퍼 사상의 신학적 뿌리 이해

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적 뿌리는 이미 그의 생애를 통하여 살펴보았듯이 어렴풋이나마 들어 났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좀더 깊이 있게 살펴 볼 것이다. 신학적 이해를 결정 할 수 있는 세 가지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은 쉐퍼의 사상가운데 분명하게 들어 나기 때문이다.

 1]성경관

쉐퍼가 가지고 있는 성경관은 매우 분명하다. 이것이 쉐퍼를 매우 분명하게 들어내는 동시에 쉐퍼를 근본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이유이기도 한다. 쉐퍼의 이러한 성경관은 구 프린스톤 신학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 그리고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그레샴 메이천의 영향속에 있었다.

성경관에 대한 이해는 사실상 미국 교회의 이해이기도 하다 그만큼 성경관으로 인하여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이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하게 이 사실을  검증하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나 본 논문의 한계와 전문성을 위하여 역사적 맥락에서 나타난 성경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의 신대륙 땅을 밟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뉴 알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철저한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중요한 기초돌이기도하다. 이러한 성경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은 독립전쟁 이후의 토마스페인,토마스 제퍼슨등에 의하여 성경의 권위를 비웃는 비평을 하였다. 이러한 비평의 흐름은 1810년 청교도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뉴 잉글랜드 하바드에서 일어났다. 하바드는 "성경에 대한 비평적 지식"이라는  강좌를 개설하였다. 성경에 대한 비평은 금박시대라 일컬어지는 1865-1900년 사이에 한층 높아졌다. 이 물결의 파고는 찰스 다윈의 과학적 작업에거 뽑아낸 진화론적 생명 철학의 영향이 점증함과 때를 같이하였다.

1870년대 중반에는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이던 제임스 멕코쉬가 자연 도태의 원리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였던 찰스 브릭스 교수의 등장은 성경고등비평의 큰 흐름을 가져왔다. 그는 유니온 신학교 학장 취임 연설에서 성경 연구에 있어서 6개의 장벽이 있는데 1)미신 즉 성경숭배, 2)문자영감, 3)성경의 진정선, 4)성경무오, 5)이적, 6)장래예언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성경비평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비평의 소용돌이속에 전통적 프린스톤 신학을 추구하고 있는 A. A 핫지와 웨스트 민스터의 벤지만 B 워필드 그리고 메이첸이 변호하며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A. A 핫지와 워필드의 합작 논문인 "영감"에서 성경의 영감성을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이들은 성경의 외증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를 비판하였던 비평가들과는 다르게 성경의 내증을 통하여 강조하였다. 핫지는 신학개요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교회는 성경이 영감받은 기자들의 손에서 나온 당시의 본래의 친필 원  본에 대해서만 절대적인 정확 무오성을 주장해 왔다"

이것은 프린스턴의 조직신학자인 찰스핫지의 분명한 사상이기도 한다. 그는 성경변호에 있어서 남에게 굴복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성경의 중요성이 성경이 무엇인가라는 점보다. 성경이 무슨일을 하는가라는 점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찰스핫지는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명백히 제시하고 있다는 점과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교회에 속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모두.... 믿음이나 실천에 필요한 제반 사항에 있어 성경의 의미에 관한 견해를 같이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메이첸에 와서 더욱 분명하였다. 그의 책 {현대의 기독교 신앙}에서 그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지지하는 견해는 성경 저자들이 그들의 전생애동안 섭리적인 질서속에서 그들의 과업을 준비 했고 이후에, 이 모든 것에 덧붙여 축복되고 경이로우며 초자연적인 성령 하나님의 지도와 동력을 받아 다른 책들과는 달리 오류들로부터 보호되었으며 그러므로 그 결과로 생긴 책인 성경은 그 모든 부분에 있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물에 관한 언급에 있어서 완전하고, 그 명령에 있어서 완전한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충만하거나 "완전한" 영감의 교리이다. 이 교리는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지혜와 조화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이 교리를 진지하게{그리고 실제 그 교리에 따라 행동하므로}붙들면서,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 쾌락과 현대교회의 많은 교회론적 권위들을 향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교리는 모든 면에서 매우 축복된 것이므로, 만약 사람이 그 삶을 이 교리위에 두면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모든 슬픔과 모든 전쟁속에서 매우 즐겁고 아주 침착한 삶을 살게 될 수 있다"

메이첸은 특별히 오번선언서가 출판되고 해외선교부의 문제가 들어나면서 메이천은 더욱 분명하게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논쟁을 하였다. 이러한 소용돌이 가운데 메이첸은 북장로교에서 탈퇴하여 웨스터 민스터 신학교 중심으로 바른 독립교단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소용돌이 가운데 쉐퍼의 학문하는 기간들은 모두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이었고 본인 스스로가 장로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규정할 수 있는 말은 "그는 성경의 사람이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의 회심의 사건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고 그의 목회사역 그리고 그의 라브리사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믿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당시대의 성경 유오설자들과 맞섰으며 성경무오설을 믿고 고백하는 이들과 함께 그 유명한 시카고 선언을 작성하였던 것이다. 쉐퍼는 온전한 성경관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한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복음주의가 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 특별히 그는 로잔대회의 연설에서 우리가 확고하고 강경한 성경관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였다.

"첫째는 성경을 확고하게 고수 하는 것만이 성경이 스스로에 대해 가르치는바와 또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대해 가르치신 바를 충실히 따르는 길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제 앞으로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우리와 우리의 영적 자녀와 육적 자녀에게 말이다. 그런데 확고한 성경관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앞으로 닥칠 어려운 시대에 대해 준비를 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없는 한 상대주의 세상에 기독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확고한 성경관만이 상대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세워진 영향력이 있는 문화의 압력을 버틸 수 있다. 그러므로 확고한 성경관을 위하여 하나가 되어 싸우자고 외쳤다. 쉐퍼는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야 하며 이런 중생을 체험한 이후에야 일생을 통해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쉐퍼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성경의 약속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며,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세상을 위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며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확고한 성경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개혁주의의 산물이요 구 프린스톤 신학의 열매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이다.

2] 교회관

프란시스 쉐퍼의 이러한 성경에 대한 분명한 입장은 그의 교회관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미 북장로교의 분열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 지를 분명히 하였던 쉐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더욱 확고히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교리의 순결성과 교회의 공동체의 실재성을 자발적으로 알려 지게 하는 교회여야 한다."

쉐퍼는 교회의 가시적인 순결성을 지키기 위하여 인간적인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하지만 계속 자유주의를 주장한다면 교회내의 자유주의자들은 마땅히 징계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참으로 진리를 말하고자 한다면 반정립의 기초위에서 내용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이러기 위해서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는 사람에 대해 징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성을 실제로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보여주어야 할 것은 우리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이다. 쉐퍼는 이러한 기준에 서서 매우 중요한 선택을 요구한다.

"교회가 더 이상 징계를 활용하지 않은 지경에 이를때에 그 다음에 우리로서는 주님앞에 눈물을 흘리며 제2의 단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리적 순결을 위한 투쟁이 패하면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이 관계해오던 저 가시적 기구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쉐퍼를 급진주의자로 몰아가고 근본주의자라는 닉네임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쉐퍼는 이러한 결단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눈물"을 흘리며 떠나 가는 것이다. 쉐퍼에게는 가시적 교회의 순결성의 실천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는 적극적인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하여 다가오는 희생도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가 없다"

이것은 기구로서의 교회가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일차적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왕과 주로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교회에 충성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바로 쉐퍼가 철저하게 성경의 입장에서 가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뿐만아니라 쉐퍼는 교회를 불가견적인 교회(마16:18,히12:22-23)와 가견적 교회(마18:17)가 함께 존속함을 분명히 함으로 개혁자들의 교회관을 따르고 있다. 특별히 가견적 교회로서의 지역 교회를 말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존속할 신약시대의 기구"라고 하였다. 그는 교회란 사람들이 함께 알하는 곳으로서 성령에 의하여 어떤 형태로 함께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하였다. 이것은 칼빈이 교회는 사람이 세우신 건물이나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이라 한 정의와 맥을 같이한다.

쉐퍼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유지해 나가야 할 지역 교회의 표준을 여덟 개로 보았다.

"첫째는 성경적 표준은 교회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둘째, 초대교회의 교회의 모습을 통하여 볼 때 회중은 특별한 방법으로 매주 첫째 날에 모였다.(고전16:2, 행20:7) 셋째, 지역교회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직원들(장로들)이 있다(행20:17-34, 딤전5:17, 행6:1-6) 넷째 교회의 공동체들의 물질 부문의 책임을 맡을 집사들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교회는 징계를 신중하게 시행해야 한다.(고전5:1-5) 여섯째, 장로와 집사들의 대한 특별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딤전3:1-13, 딛1:5-9) 일곱째, 개교회보다 더 넓은 범위의 조직을 할 근거가 있다. 여덟째, 성경적 표준으로 세례와 성찬의 두 성례 시행이 있어야 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볼 수 있듯이 프란시스 쉐퍼는 그 누구보다도 종교 개혁의 역사적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핫지 부자, B.B.워필드 그리고 J.G 메이첸의 신학에 함께 하고 있다. 그의 교회관 역시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 서있다.

3]문화관

우리에게 알려진 쉐퍼의 모습은 문화 사역자로서의 모습이다. 특별히 이러한 이유는 그의 저작중에서 문화에 대한 사상은 오늘의 상황가운데 직접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문화사역을 한다고 하는 이들마다 쉐퍼의 책은 필독 도서가 되었다. 쉐퍼는 서구 문화의 틀을 전제 위에 움직이는 흐름으로 보았다.

"역사와 문명에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은 인간의 사상에서 유래되는 것이고, 인간의 사상에 근원을 둔다. 인간은 내적 정신 생활에 있어서는 특이한 존재이다. 즉 그들의 정신세계는 그들의 행동을 결정짓는다. 이것은 그들의 가치체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사람들은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이상으로 이러한 저네들의 기초위에서 더욱 일관성있게 살아갈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제란 개인이 인생을 보는 기본적 방법 즉 그의 기본적인 세계관, 자신들의 틀을 통해 세상을 보는 기본적인 방법을 뜻한다."

쉐퍼는 이러한 원리의 입각하여 현대문화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대중화시킴으로 도전과 비전을 주었던 쉐퍼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화란의 신학의 틀 안에서 볼 수가 있다. 화란의 위대한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 그리고 도예벨트로 이어지는 신 칼빈주의는 자신들의 독특한 성경적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일반은총과 영역주권 사상이다. 이들의 사상은 피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구해야 할 삶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1920)는 누구보다도 칼뱅주의 문화관을 확립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카이퍼는 칼빈주의 이론에 입각하여 만족할만한 문화의 정의를 내리려고 시도했을 뿐더러 그의 전 생애는 말하자면 사상의 일대 전시이기도 했다. 카이퍼는 그의 사상을 "영역주권 사상"(thought of sphere Soverrignty)으로 대변하였다. 창조의 각 영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그 고유한 질서와 법칙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다른 영역에 의해서 지배되거나 통합 될 수 있다. 모든 창조의 영역은 다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대등한 상호관계를 갖고 있으며, 우선적으로 지배관계나 종속관계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스스로 칼뱅의 정신에 입각하여서 일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신학의 중심도 칼뱅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카이퍼는 문화가 우주의 발전과 그 유지를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과 노력의 결과를 포함한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 은총 없이는 어떠한 문화도 이뤄어지지 않을 것이다.즉, 그의 문화론은 그의 유명한 일반 은총론에 정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카이퍼는 개혁 신학의 본론으로서 일반은총론을 도입함으로써 창조의 진행과 문화활동과 시민생활의 가능성을 일반 은총으로써 설명하였다. 카이퍼에 의하면 일반 은총이란 타락한 세상을 죄에도 불구하고 보존하시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해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이다. 그러므로 카이퍼 문화 활동이란 일반 은총에 입각할 것으로 보았다.헤르만 바빙크는 이러한 카이퍼의 일반은총의 교리를 신학적으로 분명히 하였다.

또한 칼빈과 카이퍼 그리고 스킬더와 바빙크의 영향으로 화란 자유대학의 법철학 교수였던 헤르만 도예벨트는 영역주권사상에 대하여 더욱 체계화하였다. 그는 카이퍼의 사상을 우주법칙이론에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다. 도예벨트는 근본적인 15개의 존재방식을 지칭하는 말로 양상구조를 제시하였다. 도예벨트는 이러한 15개의 양상구조에 카이퍼의 영역주권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그 용도를 확장시켜서 양상들 상호간에 비환치성을 가리키는데에도 사용하였다. 도예벨트는 서양 문화의 뿌리는 서구의 근본적인 동인들에 의하여 통제되어 왔다고 보았다. 첫 번재 동인은 고대의 형싱과 질료 동인, 두 번째 동인은 자연과 은총의 동인, 세 번째 동인 자연과 자유의 인본주의 동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기본적인 동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도예벨트의 이러한 사상은 많은 영향을 미치었다. 그중에 화란의 예술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인 한스 로크마커이다. 한스 로크마커는 도예벨트의 제자로서 카이퍼 박물관의 소장으로 쉐퍼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쉐퍼에게 있어서 한스와의 만남은 쉐퍼의 사상을 좀더 넓이는 기회였다. 이러한 만남 가운데 쉐퍼의 서구 문화사를 보는 눈은 자연스럽게 도예벨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쉐퍼 역시 서구 사상의 흥망성쇠를 논하면서 도예벨트의 동인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쉐퍼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사상은 화란 칼빈주의의 신학적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4]사회관

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적 뿌리를 이해하는 네 번째 관점은 그의 사회관에서 볼 수 있다. 특별히 그의 국가와 법에 대한 이해는 그의 신학적 틀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쉐퍼는 국가와 법에 대한 이해를 청교도들의 사상에서 가져 왔다. 그는 낙스와 루더포드 그리고 이들의 영향아래 18세기의 부흥을 일으켰던 청교도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의 사상을 정립하였음을 볼 수 있다. 쉐퍼는 기독교인과 국가와의 궁극적인 관계에 대하여 분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국가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국가에 권위를 주셨다면 그 국가는 자율적입니까? 정말 인간이 모든 것들의 척도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삶의 다른 모든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하나님의 법 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의 외침과 동일한 것입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의회에 보내는 상소』에서 종교문제를 다루고나서 세속권력, 특히 왕권에 대한 저항의 문제를 다루었다. 왕이 전제[독재]를 할 때 신하들은 "엄한 권고와 충고"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교정하고 억제해야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왕들이 선하든 악하든 우리는 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은 낙스에게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으로 들렸던 것이다.

존 낙스의 사상은 청교도들의 큰 영향을 주었다. 특별히 낙스의 영향을 받은 1600년대의 인물인 사무엘 루더포드는 역사적인 책을 저술하였다. 그 책은 바로 『왕과법(Lex Rex)』이었다. 쉐퍼는 이 책을 기반으로 시민불복종운동의 원천으로 제시한다. 루터포드목사는 1644년경에 그의 유명한 책인 Lex Rex를 썼다. 이 책은 왕과 백성들 사이의 투쟁을 자아냈다. 당시 가장 뜨거운 문제인 왕과 법문제를 다루었다. 왕은 법위에 군림한다는 사상을 정면으로 대치한 내용이었다. 이 책은 언약도들의 정치원리와 정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힌 책이었다. 왕권은 백성들에 의해서만 수여되는 것이요 백성들이 원치 않을 때에는 왕의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은 국가의 가장 높은 종이며 언제나 섬기는 종임을 잊어서는 않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절대 권력이란 불합리하고 이치를 거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군주의 의지가 절대로 옳고 그름의 규범이 되어서는 안되며, 나라는 오직 법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왕권 신수설과 절대군주론을 굳게 붙든 왕으로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지 않을수 없었고, 배포된 책은 모두 다 수거하여 불에 태워졌다. 이같은 발언은 존 로크가 민주주의 정신을 이야기 하기 50년전에 한 종로교 목사에 의해서 가르쳐졌으며 존 낙스이후로 스코틀란드 국민 정서이기도 하였다.이와 같이 쉐퍼의 사회사상은 스코트랜들의 청교도사상에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긴 여행을 통해서 쉐퍼의 신학적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쉐퍼의 사상을 한쪽면으로 치우치는 면이 있엇다. 일부는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은 칼빈과 베자를 걸쳐 화란 개혁주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다른 일부는 칼빈과 낙스 그리고 청교도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어 졌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은 어는 쪽에 치우쳐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부류의 개혁주의 사상을 모두 섭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별히 그의 사상은 전통적 개혁주의 사상에 서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쉐퍼의 개혁주의 사상의 형성에는 이미 살펴 본대로 교회사적 멘토들이 있었다. 존 칼빈, 존 낙스, 사무엘 러더포드, 그레샴 메이첸 , 반틸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예벨트 ,한스 로크마커 이들 모두는 쉐퍼의 신학적 사고의 긴 여행에 영적 멘토요 동역자들이었다. 이들은 곧 쉐퍼였으며 쉐퍼는 이들의 영적 작업을 토대로 20세기의 인본주의 세계에 폭탄을 던진것이다.

Ⅳ.결론 - 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적 배경이 주는 의미

우리는 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적 뿌리가 어디에 있는 가를 긴 여정을 통하여 살 펴보았다. 물론 교의신학적인 관점에서 일일이 살펴보지는 않았다. 이렇게 한 의도는 우리가 살펴 본 성경관, 교회관, 문화관, 사회관의 입장을 통해서라도 그의 사상이 어디에 있는 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으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동시에 쉐퍼에 대하여 알려진 사상에 대한 배경을 좀더 효과적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적 뿌리는 철저하게 개혁주의 전통에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매우 의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제임스 패커가 지적한대로 쉐퍼는 "20세기 중반에 영어 사용권의 복음주의에서 치명적으로 결핍되었던 문제들을 탁월하게 구현해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어권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문제요 결핍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핍이 있었던 것은 한국 교회의 정치적 상황과 매우 밀접한 것이다. 분단 국가로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대를 살아온 한국 교회가 살아 남기 위한 자구책의 모습 속에서 볼 수 있다.

특별히 독재 국가 권력의 영향아래 철저한 정교 분리의 원칙을 고수한 교회는 어느 면에서도 사회 문제에 소리를 내지 않았다. 철저하게 개인 구원과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는 것이 개혁주의 교회의 모습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 참여는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교회가 하는 것이라고 치부하였다. 이러한 구도는 점차로 교회의 이분화를 촉진 시켰고 복음주의 교회 특별히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교회는 사회속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영향력의 감소를 가져왔고 결국 그토록 몸부림치던 교회의 성장은커녕 교회의 감소를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프란시스 쉐퍼의 영향은 많은 도전을 주었다. 특별히 문화적 대중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80년대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혼탁한 시기였다. 젊은 기독인들이 어떠한 자리에 서 있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세계관 운동과 더불어 소개된 쉐퍼의 사상은 고민하던 젊은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정교분리와 개인구원 그리고 교회성장에 파묻혀 있던 교회는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엄청난 난관이 있었다. 더구나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은 한국 교회의 상황으로는 너무 급진적인 것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미성숙한 한국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말로는 개혁주의, 복음주의라 하지만 사실은 개혁주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교회를 형성하고 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 그리고 18세기의 부흥 운동 그리고 19세기의 대각성 운동은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러한 놀라운 부흥의 역사 가운데 흐르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대로 행동하였다. 말에 갇혀있지 않고 신학을 삶으로 분명하게 보여 준 전도자요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은 참다운 개혁주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개혁교회의 결핍을 바르게 구현해 냈기 때문이다. 묻혔있던 개혁주의 신학사상을 대중앞에 드러내 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쉐퍼의 사상의 신학적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20세기라는 시대에 참된 실재요 참 진리인 하나님을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살다간 쉐퍼의 삶과 사상이 한국 교회 앞에 바르게 접목되어지기를 기대한다. 쉐퍼는 숨을 거두기 전날 이렇게 기도하였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전 저의 일을 끝냈습니다. 저를 본향으로 데려가 주십시오.저는 지쳤습니다."

하나님은 현대의 사상적 혼돈시기에 참 진리를 위하여 싸웠던 사랑하는 자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본향으로 데려 가셨다. 위대한 복음적 개혁주의자 그리고 위대한 문화사역자 그리고 더욱 위대한 사회 개혁자인 쉐퍼는 이 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역을 마치고 본향으로 간 것이다. 쉐퍼가 간 길에는 정말로 많은 씨앗을 뿌려졌고 그를 통한 복음의 열매는 20세기의 혼합된 세계관속에 신음하며 살고 있는 영혼들에게 단비와 같은 신선감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복음의 사역의 만개는 21세기가 될 것이다. 특별히 한국에서 더욱 꽃피게 될 것을 소망해본다. 

오늘도 여전히 교회 성장주의에 찌들려 있으므로 나의 주변에서 죽어가며 소리치는 아우성을 외면하는 지도자와 교회가 아니라 현실의 아픔을 분명하게 목도하면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외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민족이 가야 할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로 가지고 이끌어주는 지도자 필요한 시대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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