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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온 그곳에 또 들어가라고요?”
[그때 그 사건 (3)] 영생교 취재 현장
2010년 11월 08일 (월) 06:48:16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중년의 한 여인이 급히 사무실로 찾아왔다. 한 단체로부터 큰 피해를 보았다며 하소연을 했다. 예의를 지키며 차분히 말하려는 그의 얼굴 뒷 편에는 ‘엉엉’거리며 통곡하는 모습이 보였다. 억울한 일이 많은 가보다. 그의 말 그대로라면 작은 일이 아니다. 피해자는 그만이 아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훨씬 많았다. 그들은 서로 그물망처럼 연락을 해가며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억울함을 들어줄 곳을 찾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할 작정이었다. 마치 작은 불꽃이라도 튀기면 순식간이라도 활활 타오를 듯한 기름 덩어리와도 같았다.

그곳은 바로 ‘영생교 승리제단’(이하 영생교, 교주 조희성, 사망)다. ‘육신이 죽지 않는다’, ‘교주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이긴자다’는 등의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는 이단 단체다. 지난 1981년 경기도 부천에서 설립됐다. 미리 언급하지만, 교주 조 씨는 1990년부터 1992년 사이 신도 등 6명에 대해 살해를 지시한 혐의(살인교사) 등으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는 범인도피 혐의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서울구치소 수감 중 그는 가슴 통증을 호소했고 병원으로 호송하던 중 숨졌다(2004년 7월). 현재(2010년)도 이 단체는 그대로 존재한다(http://www.victor.or.kr).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피해자들이 드디어 단체 행동에 들어갔다.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이다. 자신 또는 자신들의 자녀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내용의 피켓을 만들고 교주의 비성경적인 사상에 대해서 규탄하기 위해서다. 많은 신문 방송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피해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호소를 담기 위해 방송국 카메라 테이프가 열심히 돌아갔다. 신문기자들도 메모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만큼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종교문제에 일반 언론이 보도를 꺼린 것이 주된 원인이다. 보다 깊이 있는 내용이 필요했다.

편집부에서 그곳에 대해 직접 취재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교주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를 기해 여러 가지 행사가 많이 열린다며 그것에 대한 내용이 필요했다. 취재 기자로는 필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가 낙점(?)됐다. 병아리 기자 시절이라 이단문제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을 때였다. 그래서 선택되었나 보다. 많이 위험해 보였던 곳이었다. 선배가 가라고 하니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때 선배가 야속할 뿐이다.

사진 취재가 중점이었다. 다양하게 벌어지는 행사 사진과 더불어 교주의 모습을 담아와야 하는 특명이다. 지금 같으면 ‘몰카’라는 작고 편리한 장비를 이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상황이 열악했다. 200미리 망원렌즈가 성인 팔뚝 크기만 했다. 그것밖에 없었다. 사진 촬영하는 자세야 멋지게 나올 수 있겠지만, 들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교주 생일이 기다려지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묵직한 사진 가방을 들고 역곡역으로 갔다. 그곳 근처가 현장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본부 건물에 운집했다. 긴 수염에 갓을 쓴 조선시대 양반(?) 같은 이들도 꽤 있었다. 민속종교계통의 사람들인 듯했다. 불교계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교주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서 온 사절단이라고 한다. 종교와 인종을 떠나 많은 이들이 그날 그곳에 모인 것이다.

많은 이들로 분주한 틈을 타 건물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교주 방 같은 곳의 문을 열다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검은 양복에 짙은 색의 선글라스를 쓴 덩치 큰 이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곳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곳곳에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들은 모두 귀에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러한 장면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이라 신기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식당 종업원들도 모두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본 집회가 시작됐다. 필자도 집회장 중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약 1천명은 충분히 들어 갈 만한 평방으로 된 큰 집회장에 신도들은 남녀를 구분하여 촘촘히 줄을 맞추어 앉았다. 물론 집회장 구석구석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조금 전에 보았던 검은 양복의 그들이 서 있었다.

찬송가가 시작됐다. 그러자 신도들은 일률적으로 손을 높이 드는 눈높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많이 훈련된 듯 흐트러짐이 없어보였다. 필자도 따라했다. 안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노래도 큰소리로 했다. 신도들과 동일하게 행동해야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서서히 필자의 다리에 통증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그것보다도 사진촬영을 위해 무엇인가 행동을 취해야 했다. 이제 곧 교주의 설교가 시작될 예정이다. 고민이다. 사진기를 꺼내는 순간 ‘나는 이제부터 사진 촬영을 합니다’고 공개하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들키지 않고 사진을 찍으면 제일 좋기는 하겠지만 그럴 방법이 없다. 과감해지기로 했다. 아주 당연한 것처럼, 마치 초빙된 사진 기사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사진기를 꺼낸 후, 렌즈를 망원으로 교체했다. ‘철컥’소리가 났다. 그런 후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한 표정도 내지 않고 아주 당당하게 카메라를 들고 단상을 향해 초점을 맞추었다. 집회장 중간에 앉았던 필자가 일어나자 순식간에 모든 신도들의 눈동자가 ‘솩~’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다리가 적지 않게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연기를 했다. ‘찰칵 찰칵’ 셔터 소리는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지, 누군가 필자에게 다가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마침 단상에서는 일본에서 온 무용단의 춤이 이어지고 있어서 시선이 약간 분산된 듯했다.

집회장 뒤로 빠져 나왔다. ‘누구십니까’, ‘무슨 일로 사진을 찍습니까’ 등으로 누군가가 다가올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조용했다. 제재하는 이들이 없었다.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정말 마네킹인 듯했다. 좀더 과감해지기로 했다. 집회장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도 신도들이 가득했다. 앞쪽으로 가자 교주가 필자의 눈에 정면으로 들어왔다. 축하 공연을 보기 위해 신도들 중간에 내려와 앉은 그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그렇지, 바로 이 장면이야’ 사진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특종이다’는 맘이 들었다.

‘찰칵 찰칵’ 연속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렌즈 속에서 교주의 눈이 필자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손에서 땀이 났다. 취재기자만이 맛보는 ‘희열’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보다. 그 누구도 촬영해보지 못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기분이 바로 그것이다.

   
▲ 사진 생일잔치에 참석한 조희성 교주(필자 직접 촬영)
속마음은 두근두근 거렸지만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전체적은 겉모양은 무표정이었다. 그래야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그러면서도 신속하게 그 단체를 빠져 나왔다.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공중전화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깊은 한 숨을 내 쉬며 안도감 섞인 목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지시받은 사진 장면뿐 아니라 특종인 교주 정면 사진도 박아왔다고 말이다. 마침 사무실에 피해자 여인이 와 있었다. 필자의 취재에 그도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네! 방금 나온 그곳에 다시 들어가라고요?”

승전보에는 관심이 없고 몇몇 장면이 있어야 된다며 다시 현장으로 침투(?)하라는 것이다.

‘오~ 세상에···’

그 장면이 꼭 필요한 것이냐는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대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처음 영생교를 찾을 때와 마음가짐이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달랐다. 그곳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필자에게 발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욱 싫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무식한 자는 용감하다’는 말이 정말 옳게 여겨졌다.

‘지옥의 묵시록’의 영화 후속 편을 촬영하는 듯한 마음으로 다시 발길을 옮겼다. 왜 이렇게 발이 무겁게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검은 양복의 마네킹(?)들이 살아서 달려 나올 것 같기만 했다.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하나님, 아시죠. 이번만 어떻게든지···.’

몇 개월 후, 영생교가 교계 언론은 물론 일반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살인사건과 관련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많은 기자들이 사무실로 몰려왔다. 관련된 자료를 구하기 위해서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생교에 대해 알려진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사진 자료는 더욱 귀했다. 이 때 필자가 촬영한 사진 한 장이 특종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많은 언론사에서 이 사진을 가져갔다. 영생교가 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에 작은 일을 한 셈이다.

속상한 점은 필자의 땀이 스며든 사진을 몇몇 언론사에서는 마치 자신들이 촬영해 온 양 출처를 밝히지 않고 사용했다는 점이다. 비양심이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국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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