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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예수 왜곡의 역사>
하나님을 부정하는 역사적 비평
2010년 06월 11일 (금) 07:37:35 양봉식 기자 sunyang@amennews.com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신앙함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신학이라고 주장하면 문제가 되는가? 모든 신학이 그렇지 않지만 어느 특정한 신학이 그런 문제를 가져다줄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역사적 비평이다. 하나님을 만난 뜨거움을 풀어놓기 위해 신학을 하기 시작한 신학도가 졸업할 때는 가장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신학은 좋은 신학은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보조적인 도구이지 본질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학문의 범주에 넣고 그 범주에 맞지 않는다고 잘라내는 것은 침대에 사람을 눕히고 거기에 맞지 않는 부분을 잘라내는 것과 동일한 작업을 하는 것이 역사적 비평이다.

인간에게는 시간과 역사가 있다. 역사적 사건이 있기 때문에 흔적이 언제나 남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흔적에 대한 기억이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드라마의 역사극이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비평서인 <예수 왜곡의 역사>는 한편의 드라마를 사실처럼 묘사하고 그것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는 책이다.

이 책을 독자들에게 열렬하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신학도들(매우 조심스럽지만)이 읽어볼만한 책이지만 탐독하고 그것을 믿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 책은 인간의 한계를 철저하게 부인하고, 인간의 지식과 학문을 비교적 확실하게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점검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만 검증되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연구의 한계는 초월적이고 신비적이고 섭리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연구를 통해 성경이 모순이 많은 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한 하나님을 열렬하게 믿었던 저자가 이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저자는 성경이 모순 덩어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과 문제들을, 하나님이 계시면 일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떠났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는 비그리스인이 된 학자로부터 하나님이 문제가 있고 성경은 상당히 모순이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라고 말하는 책을 건네받은 셈이다. 이 책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더 없이 흥미로운 책이다. 더구나 기독교를 비판하기 좋은 이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선물일 수 있다.

역사적 비평의 문제는 전제다. 성경은 모순이 있다는 부정적인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비평은 늘 이런 식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심을 하고 덤벼드는 이들의 결론 역시 긍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를 일으킨다. 모순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진 의구심의 합리적 사고의 학문의 결론 도출을 긍정적으로 할 필요성이 없다.

마치 심슨 재판처럼 아내 살해에 대한 사실을 증거주의 중심으로 뒤집어 재판을 승리하게 하는 것과 같이 역사적 비평을 통해 본 <예수 왜곡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건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논지를 끌고 간다. “복음서 예수는 실제 예수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훗날의 해석이다.”라는 저자의 견해는 그냥 견해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사역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역사적 사실이 없는데 해석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성경에 대한 수많은 문서들은 다른 어떤 문서들보다 풍부하다. 원문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할 수 있다. 복음서마다 저자의 증언이 다르기 때문에 모순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영감에 대한 이해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근본주의’라고 말하는 것이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들린다. 이는 영감설과 무오성을 두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믿는 자라는 경멸의 뜻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영감은 기계적인 축자영감이 결코 아니다. 저자의 인격과 기질이 반영된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이 경전을 쓰기 위한 목적의 서신이나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성경으로 채택되었다. 경전으로 채택되는 과정 가운데 우리는 성령님의 비상한 간섭을 믿는다. 더구나 복음서를 기록하는 과정 역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비상한 간섭이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신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것을 통해 실현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의 영감성은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다. 저자는 각각의 복음서의 동일한 사건이 다르게 기술된 것은 모순이라고 말한다. 몇 가지 예시 중에 성정청결 사건이 세 복음서에는 뒤에 등장하는데 요한은 앞에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요한복음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술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세주 됨에 대한 짜깁기이기 때문에 청결사건을 앞에 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요한복음의 역사성을 무시하게 된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요한복음이 역사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 대두되는 문제가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 사역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3년 동안 올라갔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세 번으로 기록된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이 짜깁기이며 역사성을 무시한 것이라고 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 역시 3년이 아닐 수 있다는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역사적비평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근본을 흔들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접근 방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제 자체가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적인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적 능력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죽었다고 선고해 버린다.

자신들의 이성에서 일어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은 증명할 수 없고 결국 후대에 그것은 믿음으로 해석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잘못된 탐구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사실을 허구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복음서들이 기록한 예수님의 행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모순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복음서 저자들이 다양한 자료를 사용해 복음을 썼고, 그 자료들이 때때로 서로 모순됐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고 주장한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 대개 원 자료가 있다는 믿는다.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복음서를 비교하고, 또 있지도 않은 Q문서를 있다는 가정 아래 복음서들이 쓰였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가설이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Q문서의 정체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저자는 복음서가 오랜 시간에 걸쳐 구전되어 있었고, 그것조차 증명되지 않는 후대의 믿음의 해석일 뿐 역사적 사실은 없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 것인가? 원복음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4, 50년이 지난 후대에 기록된 것이라고만 볼 수 없다.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복음을 기록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한다(눅 1:1~4). 바울 서신이 먼저 쓰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누가복음을 더 자세히 보면 누가는 예수님 당시 그분의 사역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누가와 평생 함께 사역하였고 마지막까지 누가와 함께 사역하였다(딤후 4:11). 바울이 전파했던 복음은 누가복음의 내용과 동일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누가는 바울에 의해 복음을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가 사복음서의 모순을 지적할 때 사용하는 모순과 전혀 다르다.

이 책의 저자는 교묘한 방법으로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거부한다. 구약의 동정녀에 탄생을 지지하는 구체적인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후대에 와서 그것을 지적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존재 역시 시점이 있음을 의미하는 식으로 해석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어디에도 그가 탄생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말이 쓰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뉘앙스가 주는 것은 동정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이끌어간다. 예언적 성취를 부인하는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저자의 책은 철저한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어떠한 해답을 줄 수 없는 시각을 갖게 만든다.

더구나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한다. 여리고성의 전투를 모두 기억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은 인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철저한 인권유린의 제국주의 침략이다. 저자는 여리고 성의 전투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적고 있다.

“여호수아 6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여리고를 공격해, 그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죽이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이 정말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장아장 걷는 갓난아이까지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어린아이들이 타락한 도시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고 속에 자란 사람들은 다수의 의견이 옳다고 여긴다. 민이 주인이 되는 제도는 합리적이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본주의는 전혀 다르다. 신본주의는 왕정과 같은 제도다. 우리가 왕정 제도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왕의 폭정 때문이다. 그 이미지를 가지고 왕정제도는 보면 정말 선하지 않는 폭군의 피해에 대한 감정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선한 왕은 절대로 폭정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조선시대의 선정을 베푼 왕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과 같다. 왕을 신뢰하고 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를 통해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대한 그림자인 솔로몬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왕은 자신의 마음대로 나라를 둘로 나누고, 섬은 자녀들의 생일 선물로 준다. 그런데 그 왕이 선하다면 그의 행위 역시 선하시다. 선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징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선하시다. 그분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거민들에게 자신의 명령을 따라 살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나 가나안의 거민은 반역의 삶을 살았다. 왕을 오래 참았으며 그들의 죄가 가득한 것에 대해 심판을 미루었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만큼 죄악이 넘쳐흐르자 비로소 심판의 행동을 시작하셨다. 노아 홍수 시대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왕의 진노를 급하며 강하다.

하나님은 첫 열매를 받으신다. 가나안 땅의 첫 열매를 여리고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성에 대해서는 숨 쉬는 모든 것을 진멸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지만 여리고성은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아간의 집안이 몰살당하는 것도 아간이 훔친 물건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아간의 집안도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예수 왜곡의 역사>의 저자는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은 물론 구속사의 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역사에 일어난 편린만 가지고 하나님의 전체적인 운행과 섭리를 판단하고 규정한다. 그의 눈은 더 이상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로 보지 않는다. 폭군이요 변덕쟁이요 현실의 악을 방치하는 무력한 신이다.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으며, 차라리 자신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할지언정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시각과 관점에서 시작된 성경에 대한 해석과 이해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모순의 덩어리인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책에서 믿을 만한 것을 찾아내기보다 모순적인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내 놓고 따지듯 칼질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이들은 바트 어만의 책을 두 손을 들어 환영한다. 하나님을 부인하는데 적합하고 적절한 책을 마다하지 할 비기독교인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역사적 비평’에서 건질 것도 있다. 책을 상호 비교하여 읽을 때는 모순이 되어 보이지만 마태는 마태 시각으로 누가는 누가의 시작으로 읽을 가지는 의미를 비교적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또 상호 비교하면서 읽을 때 각자의 시각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나고 저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것을 모순이라고 말하지만 모순이 아니라 해석의 차이며 독자에 대한 목표의 차이다. 성경 각권의 저자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서 책을 쓰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모순되는 것처럼 차이가 있어 보인다.

역사적비평에 심취하면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성경을 복음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걸 포기하고 한참이 지난 후, 다른 이유로 나는 기독교를 떠났다. 믿는 사람을 포함한 대다수 사람이 이 땅에서 견뎌야 하는 힘겨운 삶을 고려할 때, 사랑이 넘치고 선하다는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방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런 결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흔한 고백들이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분의 선하심을 맛본 이들은 이 세상이 자신의 삶을 뒤흔들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믿는다. 저자는 역사적 비평이라는 창을 통해 성경을 보았다. 역사적 비평의 그릇된 전제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도구가 성경을 잘 해석하고 이해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듯이 저자의 결론은 성경을 믿지 못한 짜깁기 책이며, 하나님은 믿음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공고하게 하는 환상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을 모두가 믿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작업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악의적인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승천을 세계가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으로 구성되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대기권으로 올라간 그리스도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더구나 로켓추진력도 없고 우주복도 입지 않았는데 그리스도가 승천했다는 것은 상식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일이다.

창조의 원리도 이해 못하는 사람이 역사적 비평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는 것 자체가 기적일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는 별개가 아니고 매우 밀접하다. 서로 가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세계는 물리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의 공존이다. 아무도 이것을 인간의 물리적인 수치로 표현해내거나 개산하기가 어렵다.

그 세계를 경험을 해도 설명이 안 되는 초월적인 영역을 계몽주의가 가져온 인간의 합리적 지성주의 파악하려는 저자이 시도 자체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무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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