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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지는 영원한 생명이다
2010년 05월 07일 (금) 07:58:13 장경애 jka9075@empal.com
<사람을 위한 영성> 중에서
로드니 클랩 지음/ 홍병룡 옮김/ IVP 펴냄


정통 기독교 전통은 인생이 너무 연약하고 덧없는 것이어서 모든 신뢰와 소망을 거기에 두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중요한 존재가 되고 행복해지려고 애쓰는 모습을 관찰했다. 우리는 권력과 번영을 추구한다. 그것들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진정한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 권력과 번영의 ‘행복’도 사고와 질병, 전쟁, 죽음 등의 위협을 늘 받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축적하고 얼마나 많은 보험에 들든, 거기서 얻은 행복은 ‘유리와 같이 깨지기 쉬운 찬란함이요, 언제 부서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식당하고 마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실제를 곧바로 직면하는 것이 낫다.” 내가 확신하는 바는, 언젠가 죽지 않을 사람은 없으며, 인생의 끝은 가장 장수한 사람을 가장 단명한 사람과 같은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작년보다 금년, 오늘보다 내일, 어제보다 오늘 죽음에 더 가깝지 않은 자가 없고, 현재보다 조금씩 더 죽음에 가까이 가지 않거나 조금 전보다 현재 죽음에 더 가깝지 않은 자가 없다.” 따라서 “우리의 평생은 죽음을 향한 질주에 불과한 것이다.” 더 오래 사는 자는 죽음의 종착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더 긴 여정을 걷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음의 직면에 필요한 용기와 자원을 신앙에서 찾았다.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이 우리 몸과 환경의 일시성을 극복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영구적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그 혹독한 사실들을 직면하고 금욕적으로 수용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 전통적 기독교 영성은 현대의 심리치료와 달리 현재 상태에 ‘적응하는’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최후 상태는 결코 현재 상태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깊고 영구적인 행복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 오히려 일시적인 지상의 기쁨만 열망함으로써 너무 작은 열망을 가지는 것이 잘못이다. ‘불확실하고 희미한 기쁨이 전부인 양’ 그것들에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의 열망은 더 커져야 한다. 더 멀리, 더 높이 눈을 들어 완전히 회복되고 성취된 그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이 우리를 감싸게 될 것이며, 그 종착지는 바로 영원한 생명이다. 여기야말로 우리가 안심하고 가장 큰 신뢰와 소망을 둘 수 있는 곳이요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런 용기를 품고 일상 생활에 즐비한 죽음의 단편을 직시할 수 있다. 한때 싱그럽게 빛났지만 지금은 썩어 버린, 고운 색깔로 불탔지만 바싹 메말라 버린, 아름다웠지만 초라하게 변한 가을의 낙엽은 죽음을 이야기한다. 말없이 시들어 버리는 우정, 직업의 이동, 작별 인사, 망각된 일화들, 어느 순간이나 경험도 다시는 그대로 재현될 수 없다는 깨달음 …. 이 모든 것이 작은 죽음이다. 그런 것들은 부활의 이편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고 녹고 시들고 스러진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그것들은 움직이는 거울이나 달리는 자동차 유리창의 거울에 비치는 섬광과 같이, 우리의 죽음과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의 운명을 가리키는 표지들이다. 그런 연상 매체를 무시하려고 무척 애를 쓸 수 있지만 기독교 영성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 작은 죽음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더 큰 죽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고통으로 얼룩진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고통이 없는 체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로 인한 영구적인 기쁨에 비추어 그것들을 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지상의 기쁨을 꼭 붙들고 가능한 한 오래 그것을 있는 그대로 유지할 것이냐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런 것을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영생의 소망 안에서 사랑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와 우리 세계가 올바른 안목을 갖고 장차 임할 참된 행복을 누릴 준비를 더 잘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죽음을 부인하지 않고 죽음의 실제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면서, 이직 거리가 조금 있을 때 죽음에 익숙해져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 C.S.루이스의 현명한 조언처럼, 충치로 고통받고 있지 않을 때 충치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예비하는 것이 더 쉽다. 만일 당신이 뱀을 몹시 무서워한다면, 뱀 구덩이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안전한 지점에서 뱀을 보는 것이 좋다. 마르틴 루터도 이와 관련하여 지혜로운 조언을 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죽음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죽음이 아직 좀 떨어져 있고 움직이지 않을 때 그것을 우리가 있는 곳으로 초대하면 된다.” 이 말은 달려드는 ‘움직이는’ 사자가 아니라 거리를 두고 있어서 위협적이지 않은 사자를 떠올린다. “죽음의 순간에는 … 이것이 위험하고 쓸모 없는 짓인데, 그 때는 죽음이 자기 존재 위에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 때 우리를 덮치는 사자는 해와 하늘과 다른 소망이나 관점을 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막을 만큼 크다는 뜻이다.

기술에 열광하는 시대에 우리가 얼마나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지, 혹은 우리 아이들이 몇 살 때 그것을 직면해야 하는지에 대해 신통한 해답을 제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정도는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죽음의 실제를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얘기하지 않는가? 세례도 하나의 죽음 즉 물에 빠져 죽는 것인데,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녀는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우리로서는 그들이 던지는 질문에 늘 깨어 있을 필요가 있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온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그 죽음을 완곡하게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어시스트 장경애/ 빛과소금교회 최삼경 목사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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