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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단절의 극단적 상태, 우울증
2010년 03월 19일 (금) 07:35:54 장경애 jka9075@empal.com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중에서
파커 J. 팔머 지음/ 홍윤주 옮김/ 한문화 펴냄


우울증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이 수동적인 행동이거나 포기는 아니다. 낯설어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아의 힘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다림이며 지켜보는 것이다. 귀 기울이는 것, 고통을 겪어내는 것,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가능한 대로 자기에 대한 지식을 수집하는 과정이다. 그런 다음 그 지식을 바탕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매일 매일 자기 자아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버림으로써 다시금 건강한 삶으로 한 걸음씩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얘기하는 지식은 지적이고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완전하게 하는 것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완전함으로 이끄는 그 선택은 실용적이거나 계산되는 것이 아니며 어떤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개인적 진실을 간단하면서도 심오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힘든 길이기에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나는 안다. 나는 그 길을 두 번이나 걸어야만 했다. 첫 번째에 알게 된 나 자신의 모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알게 된 것을 거부했고 필요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 대가는 지옥의 경험을 한 번 더 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나를 잠깐 찾아왔던 어떤 사람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의 나는 그때 누가 곁에 있고 누가 없는지도 잘 알 수 없을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우울증은 관계 단절의 극단적인 상태이다. 우울증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선인 관계성을 끊어 버린다.

나를 찾아왔던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은 모두 호의로 찾아왔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의 행동은 ‘욥의 위안자’와 같았다. 비참한 처지의 욥을 찾아와 ‘동정’을 보여 그를 더 깊은 절망으로 빠뜨린 친구들 말이다.

어떤 사람은 내 기운을 북돋을 양으로 이런 말을 했다.
“날씨가 아주 좋네요. 밖에 나가서 맘껏 햇빛을 쬐며 아름다운 꽃이라도 보는 게 어때요? 분명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하지만 그런 조언은 나를 더 깊은 우울증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로서는 나도 그 날 날씨가 눈부시게 좋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내 감각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단절을 느낄 때마다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해 준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파커. 가르치는 일도, 글 쓰는 일도 아주 잘 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구요. 당신이 했던 좋은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분명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그 충고 역시 나를 더 깊은 우울에 빠지게 했다. ‘좋은’ 사람으로 비치는 외적인 내 모습과 당시 내가 믿고 있던 나의 ‘나쁜’ 모습 사이의 엄청난 격차만 절감할 뿐이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 또 속았군. 내 진짜 모습이 아닌 다른 이미지를 본 거야. 사람들이 진짜 내 모습을 본다면 당장 나를 밀어내겠지.’

우울증은 관계 단절의 극한적인 상태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머리와 감정 사이를. 또 자기가 보는 자기 이미지와 남들이 보는 자기 모습 사이의 관계를 끊어 놓는다.
이렇게 말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신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그들이 주려는 어떤 위안이나 위로도 나는 그냥 귓전으로 흘려 들었다. 모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신비를 똑같이 경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역설적으로 나를 도와 내 문제를 찾아내려는 어떤 친구의 감동적인 시도는 오히려 지나치게 나를 까발려 놓아서 나를 더 깊은 고립감에 빠져들게 했다. 단절은 지옥처럼 끔찍한 것이지만 잘못된 관계보다는 낫다. 친구들에게 ‘위로’도 받아 봤고, 나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남을 위로하려 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 증상이 어떤지는 알 것 같다. 바로 회피와 부정이다.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쓸모 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위안자들처럼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는 저 불쌍한 사람과 자신은 다르다는 걸 재차 확인하려고 든다. 그런 느낌에 빠져들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그러나 사실은 나를) 자유롭게 해 줄 충고를 하나 하겠다. 당신이 내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좋아질 것이다. 당신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다 해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당신이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어느 쪽이든 우울증에 걸린 상대에게서 멀어짐으로써 자신은 위안을 얻고,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내 곁에 함께 있어 줄 용기를 가진 가족과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빌이라는 친구였다. 그는 내게 허락을 얻어 매일 오후 우리 집에 들러서 나를 의자에 앉히고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긴 다음 30분 동안 발을 마사지해 주었다. 그는 아직 감각이 살아 있는 내 신체 중의 한 부분, 그래서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낸 것이었다.

빌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말을 할 때도 충고 따위는 절대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느끼는 내 상태를 말해 주었다. “오늘 네가 얼마나 힘든지 느껴진다”거나 “네가 더 강해지는 것 같은데”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늘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은 정말로 도움이 됐다.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소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이에게는 생명을 주는 일이다. 그 친구의 행동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발을 씻어 준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시스트 장경애/ 빛과소금교회 최삼경 목사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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